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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Mar 21. 2024

나를 찾는 숨바꼭질

  이러다 진짜 작가 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묵직한 졸음이 몽롱하게 만드는 이 시간에 노트북을 폈다. 그냥 펴놓고 뭐라도 써야 될 것만 같다. 창밖에 까만 어둠을 잉크처럼 찍어서 진한 감동을 주는 한 꼭지를 써낼 것 같은 기대를 하는 걸까? 자정을 바라보는 이 시간에? 까만 어둠은 눈두덩 위에 앉은 졸음을 편안하게 자리 잡게 도와주면 그만인 것을 잉크니 뭐니 하며 헛소리를 긁적이고자 하는 자의 뜬금없는 소리를 듣게 된 것에 뜨악해한다.


오랜만에 맞이한 깊은 침묵을 반가워하며 이 밤을 통과하고 있다. 해가 있는 낮엔 볼륨을 높여도 잘 들리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마저 없는 초봄의 한밤중엔 침묵만이 꽉 차있다. 예전부터 그랬다. 고요한 밤엔 온전히 내 세상인 것만 같았다. 그냥 좋다는 거지 별 뜻이 없다.


온전히 나 혼자일 때 나를 만나는 일이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 측면에서 고요한 이 밤이 제격이다. 워낙에 뭔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서인지 100세 시대라는데 이제 50 중반 고개를 넘어가는데 넌 뭘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게 된다. 또 어느 한편으로는 반평생을 살아냈는데 '네가 살아온 결과물이 뭐니?'라고 묻게 된다.


앞으로 잘 살아내라고 가끔 '나는 내가 맘에 든다.'라는 말을 자기 최면처럼 읊조리곤 했었다. 딴엔 다시 살아내라면 사양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특별히 내놓을만한 성과가 뭔지 모르겠다. 시각화할 수 있는 결과물도 딱히 생각나지 않지만 요즘 스스로에게 채권자처럼 나이에 걸맞은 성숙도를 강요하고 있다.


알고 보면 '나는 내가 맘에 든다.'라는 말의 의미는 성과와 관계가 있는 자기 평가가 아니다. 다양한 인간군상들 중에 그래도 성향이나 성격이 마음에 든다는 거라고 해두면 맞을 것 같다. 워낙 음식도 기름진 걸 싫어하듯이 솔직하고 담백한 걸 좋아해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었다.


삶의 주기가 그런가 싶다.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늘 분주했었다. 그 한 챕터를 넘기면서 폭풍처럼 달려드는 공허함에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었는데 그래도 무사히 그 산을 넘었는지 새로운 시작을 해볼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또 다른 산의 정상에 깃발을 꽂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차분히 내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찾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새로운 걸 찾기 전에 현주소를 알려고 그러는 건지 자꾸 살아온 세월 속에서 네가 취한 게 뭐가 있냐고 묻는다. 이를테면 덕성스러움이 장착되어 있기를 원한다. 경험으로 쌓아 올린 탑이 아마도 덕성스러움이라는 생각에서 인 것 같다. 주변인들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주고 싶어 하는 욕심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들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스스로의 합리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적인 내가 아닌 절대적인 나 자체로 그냥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존중해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 굳이 일삼아서 스스로를 해부하고 평가하고 그리고 더 성장하기를 강요하면서 살 필요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고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앞으로 맞이할 나는 어떤 나일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고요한 이 밤에 나랑 마주하고 있는 내가 좋다.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운동을 가는데 앞서간 가족들을 따라잡기 위해 뛰어갔는데 전신줄에 앉아있던 비둘기가 싼 분비물이 내 이마에 딱 떨어졌다. 급히 화장실로 가서 수습은 했지만 그 찰나에 내 이마에 적중한 걸 생각하며 호탕하게 웃었던 스스로를 생각하며 슬며시 마음에 들어 한다.


본래 성정이 그런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취향이 많이 변한다는 걸 느낀다. 별로 크게 관심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어느 때부터 수국이 좋아졌다. 그 결과 집에 수국화분이 열개가 넘는다. 또 관심이 없었다고 하기엔 좀 많이 싫어했었던 꽃이 제라늄이었다. 너무 원색적이란 생각에서 그 꽃을 볼 때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제라늄 화분도 다섯 개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까지 산수유꽃을 보면 '꽃이 왜 저럴까?'라고 좀 안 됐다 싶은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산수유가 갑자기 예뻐 보인다. 내 변덕스러운 취향에 내가 놀란다.


다가오는 세월 속에서 나는 어떤 나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산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많이 다르다. 스스로가 낯설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일의 내가 궁금해진다. 오늘의 나는 내게 내일을 준비하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냈으니 깊고 넓은 사람이 되어 있어야 맞다고 내게 심문한다.


한 해 한 해가 다른데 지금 당장 내일의 나의 청사진을 강요한다고 답이 나오기 만무하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고 또 쉬는 것도 답 중에 하나가 되어도 비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방향성을 찾는다고 하지만 이미 그 방향성은 답이 있는데 못 알라차린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 나는 깊고 넓은 사람이길 원한다. 앞으로의 나도 지금보다 조금 더 깊고 넓은 사람이면 될 것 같다. 건강하고 멋진 나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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