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플, 악플, 선플 그리고 당근과 채찍 다 관계 속에서 태어난 산물이다. 악플에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사람도 있는데 무플 보다 악플이란 말을 한다는 건 제대로 악플 맛을 못 보았거나 워낙 단련이 된 사람일 거다. 죽을힘을 다해 견디는데 워낙 단련이 되어 잘 버틴다고 하면 또 한방 맞은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오십 대 중반이라고 한참을 중년 행세를 했다. 그런데 나라에서 갑자기 나이를 조정해 버리는 통에 내가 내 나이를 잘 모르게 되어 몇 년생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이제는 육십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덕망이 갑자기 생긴다거나 현명해지거나 뭐 그러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나이만 들었지 다 똑같다는 어느 노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감성은 같다는 뜻이겠지만.....
정년이 두렵지 않다는 둥 당장 현실감이 없어서 떵떵거리고 자신만만해하다가 갑자기 정년이 당겨질 지경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하니 광활한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막막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 시간들을 글을 쓴다거나 마음 내키면 그림을 그린다거나 그리고 텃밭을 하면서 살면 그나마 많이 공허하진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하곤 한다. 궁여지책으로 그나마 그런 거라도 꺼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삼 년이 지나고 근 사 년째 뒷산 산책로 초입에 있는 텃밭을 일구며 지낸다. 워낙 좋아해서 횡재한 기분으로 열심히 임하고 있다. 산기슭에 위치해 있어서 고라니 먹이를 조달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한다. 별 소득 없는 노동을 하면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덕분에 운동을 하게 된걸 감사히 생각하며 지낸다.
속세가 싫어서 어느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특별한 마을에서 지내보았던 이가 익숙해지니까 세상밖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아서 그곳을 나오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내게 텃밭이 그렇다. 힐링의 공간이고 기쁨의 장소일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별별일이 다 있다. 이걸 굳이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계속해야 되나 싶은 생각까지 들곤 한다. 그럼에도 견디는 이유는 퇴직 이후의 공허함을 그래도 일부분 채워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늘진 산기슭에 계단식 밭이 있다. 그곳에는 딱 열명의 텃밭러가 있다. 그중 내게 아니 모두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다. "통반장 하시면 잘하실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듣던 다른 분이 백퍼샌트 공감의 웃음을 웃었다. 그분의 유일한 사회생활공간이 텃밭이다. 그분의 특징은 당근과 채찍을 아주 어마무시하게 잘 써먹는 분이다.
다른 면에서는 땅 주인도 아니면서 거의 영주인 것처럼 모든 땅이 본인 땅인 것처럼 행세를 한다. 뿐만 아니라 간섭이 하늘을 찌른다. 새로 밭을 하게 된 옆밭분의 말을 빌리자면 밭을 누가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밭을 풀이 무성하도록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 아마도 그분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본다.
모든 걸 관여하고 지적질에 때에 따라서는 야단까지 경계가 없다. 그러다가 모종을 주거나 씨앗을 주곤 한다. 가끔 시금치며 상추 등을 주기도 한다. 채찍과 당근을 줘가면서 사람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재주를 부리곤 한다.
뿐만 아니라 매일 하루에도 이삼십 개의 톡을 보내곤 하면서 가끔 지옥을 맛보게 한다. 어제도 많이 톡을 보내서 한 오십 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칠십일 개의 말주머니를 보냈다. 그런 후 오늘 아침에 어제는 기분 나쁘라고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며 지금까지 이십 개의 톡을 보냈다. 배추랑 유채 가져가려면 가져가란다. 단호히 "아뇨"라고 답했다. 경계를 넘는 행동을 마음껏 하고 당근을 제안한다. 관계 유지를 위해서 단호하지 못한 자업자득의 결과라는 걸 안다. 텃밭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별도리가 없다. 참는 수밖에.
먼동이 트는 과정을 보면서 텃밭을 향해 산을 오른다. 때론 그곳에서 넘실거리는 아카시아꽃이 향기로 나를 마중 나오곤 한다. 텃밭을 유자형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연초록 도토리나무가 햇빛과 사랑을 속삭이듯 넘실거리면 '이곳이 천국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뿌려 둔 씨앗들이 움틀 때면 저절로 눈이 반짝거리고 입이 귀에 걸린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든 곳이 바로 그곳, 텃밭이다.
그 어느 곳이든 양면성이 있다. 다 좋기만 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인가 보다. 어쩌면 늘 좋기만 하고 좋지 않은 경험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면 좋은 것을 좋은지 모르고 당연하게만 여기면서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내고서 좀 많이 의외인 구석을 발견했다. 정년퇴직 후의 나를 위해서 텃밭을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릉도원 같은 풍경 때문도 아니고 텃밭을 하는 이유라고 말하는 운동을 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좀 과하기도 한 그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곳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곳을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놀라운 일이다.
칠십 인 그 통반장 역할을 하는 분의 유일한 사회생활이 텃밭이다. 그분은 세계 유명 관광지를 다 다녀도 텃밭이 제일 좋다고 했다. 때론 가진 게 많아서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고 특별한 목표의식도 없어 보이는 그분이 딱해 보이곤 했다. 슬며시 '훗날의 내 모습이 저러진 않겠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끔 무례할 정도로 경계를 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싫은 내색을 하면 "친구 같고 동생 같아 그랬다."라고 말하며 내게 다가온다. 아마도 사람이 그리운 거라는 생각이다. 오십 년 가까이 본 남편과 단둘이 살면서 아무 걱정 없이 가는 세월을 정면으로 맞으며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발도 걸어봤다가 말도 걸어봤다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 던지듯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화유적지가 그리고 자연풍광이 제 아무리 무릉도원급이라도 누군가와 상호작용 없이는 살아있음을 의식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과의 북적이는 직장생활이 끝나면 덩그러니 홀로 남아있는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말했듯이 적절한 스트레스는 정신건강상 필요하다고 했다. 때론 너무 과하다는 생각까지 든 텃밭생활이 정신건강상 필요하며 어쩌면 나의 사회생활이 펼쳐질 곳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다.
조금 슬프기도 하고 벌써부터 쓸쓸하기도 하지만 사람은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 때 비로소 살아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노후생활을 위해 날마다 스트레스가 존재하는 그곳 텃밭을 끊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