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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Jun 29. 2024

글 쓸 기력이 생겼다.

외로움


  병명을 말하면 시시하다.  그러나 증상은 화려하다. 근 일주일을 '점점 세게'라는 음악기호가 생각나도록 아팠다. 발을 딛는데 온몸이 물 찬 스펀지처럼 느껴지고 그 와중에 근육이 침에 콕콕 찔린 것 같고 관절도 장난이 아니게 아프면서 머리는 머리대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병을 누그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약은 다 챙겨 먹고 연일 병조퇴를 내가면서 시각을 다투는 업무를 해결해 냈다. 지금은 폐 어딘가가 찌릿거리면서 목이 찢어지는 듯한 기침을 하고 콧물은 제어가 안되게 흘러내린다. 오늘 아침엔 내  육신이 공기처럼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병명은 감기고 이제는 글 쓸 생각은 할 정도로 제정신이 되었다. 그래서 작심하고 외로움을 덜어낼 작정이다.


 주말부부인데 남편이 이번주엔 거의 많은 날을 집에 머물렀다. 집 근처에 출장이라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이다. 큰 병을 앓기 전엔 치과를 간다거나 건강검진을 해야 되는 일 말고는 병원을 거의 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아플 땐 더 약해져서 마음이 더 감성적으로 변하는 건지 티를 안 내고 꿋꿋하게 해내면서도 참 많이 외롭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픈데 식사며 가사를 꼭 내 손으로 해야 하나를 생각하면서 신체의 아픔보다 마음의 아픔을 더 세게 앓곤 했었다. 고맙게도 마지막 출장 끝엔 가야 할 이유를 말하며 본가행을 했다. 그냥 혼자 아프고 있으면 육체적인 아픔이지만 누군가가 있으면 마음까지 아프다.



 구십 인 엄마는 병원살이 사 년 차이시다. 가끔 중환자실로 가셨다가 다시 일반실로 가시곤 하시는데 처음에 중환자실로  가셨을 땐 날마다 쉽지 않은 거리를 오갔다. 그러나 이번에 또 중환자실로 가셨다. 가까이 사는 큰언니와 동생이 수고가 많다. 못 간 딸들에게 영상통화를 하게 한 큰언니 덕분에 그래도 머루알 같은 엄마의 눈망울을 확인하고 한걱정 놓았다. 그런데 방금 전에 큰언니가 문자를 했다. 내일 시간을 내서 엄마 면회를 오라고. 영상통화도 하고 하여 나의 병증이 간단치 않은 걸 확인했음에도 그런 문자를 한 것이다. 중환자인 엄마에게 내 감기균이 유해하기도 하지만 현재 내 상태가 만만치가 않다. 감기 때문인지 걱정이 많아서인지 통 잠을 못 자곤 한다. 그래서 더 병균이 활개를 치고 내 몸속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중인 것 같다. 그런데 언니는 내 마음을 말할 수 없이 무겁게 한다.


 나란 사람은 그렇다. 누가 뭘 어떻게 하라고 할 때까지 뭘 안 하고 그러지 않는다. 적어도 중요한 경우는 더 그렇다. 중환자실에 계신 엄마에게 못 간 마음이 말이 아닌 내게 언니는 내일 면회를 요구한다. 또 마음을 쓸 일은 누구에게 말하지 않는다. 특히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에겐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나를 걱정할까 걱정되어 함구하고 산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가 뭘 해달라고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짐작하여 미리 해주곤 한다. 런 나를 읽을 만도 한데 아직도 읽어내지 못한 건지, 나와 다른 내가 사랑한다는 사람들에게 난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감정의 동물인 인간은 시시때때로 파도를 친다. 함께라서 행복하고 함께라서 또 힘들다. 파도에 쓸려 동글동글해진 돌들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그렇게 쉽게 동글동글해지지 않는다. 아직도 아프고 힘들다. 수 없이 많이 아파했으면서도 어리석게도 처음인 것처럼 또 기대를 한다. 상대도 내 마음 같기를.


 외로움은 외면하고 싶을 때 더 깊숙이 파고든다. 외로움이란 녀석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을 땐 그래도 그 외로움을 의식하지 못한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올 때 그때부터 서서히 나를 점령한다. 끝 모를 나락으로 나를 떨어트린다. 신체의  아픔이 조금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무언가에 또 허우적거린다.


 쓰디쓴 인생을 어찌 되었든 감당해야 된다. 가끔 무엇을 위해 감당해야 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묵묵히 감당해 낸다. 찰나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누군가의 언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허망한 희망 때문인지 버텨낸다. 정작 누군가를 기대고 싶을 때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 속에 담겨 있으면서 매번 그래도 기대의 끈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공기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길 원하면서도 존재의 이유에 대해 궁금해한다. 아마도 더 살아보고자 하는 미련이 지 않고서야 뭘 또 궁금해하고 그러겠나 싶다. 아무리 단단한 마음을 갖은 사람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관계 속의 일원이라 다시 말해서 사회적 동물이라 타인의 행동이나 마음 씀씀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밀려오는 파도에 또르르 또르르 구르는 해변의 자갈돌이길 거부할 수 없다. 다정한 마음과 진한 사랑의 숨결을 원하면 원할수록 외로움의 크기만 커져가는 것이 분명하다. 아프니까 인생인지, 인생은 다 아픈 건지, 어쩔 수 없이 다 감당해야 되는 게 인생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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