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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당 Jun 25. 2023

봉래산행

모임이나 약속이 없는 요즘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면, 세상의 불편한 일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 간에 벌어지는 게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일정이 없는 내일은 무엇으로 무료함을 달랠까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가 포항 보경사의 내연산으로 가자고 한다.


최근 비가 잦았으니 폭포가 많고 시원한 내연산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내에게 그 먼 곳까지 가는 경비로 가까운 곳에 가서 맛있는 걸 사 먹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섬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가까이 있는 큰 섬이자, 자주 가 보았던 섬, 그곳의 주봉을 올라가고 싶었다.


사실 며칠 동안 더위에 지쳐 먼 곳까지 장거리 운전이 하기 싫어졌으며, 지난 주말 송도의 탑스빌 모임 때 남항대교를 건너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지하철 남포역에서 버스를 환승해 영도대교를 지나 75 광장에서 하차해 바다를 둘러보고, 길 건너 목장원을 통과하니 곧바로 임도처럼 넓은 봉래산 둘레길이다.


길 옆에는 수국 꽃이 싱그럽게 우리를 맞이한다. 주말 오전의 산길이지만 사람들이 적어 더욱 호젓하다. 마치 뒷동산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가니 이정표가 보이고 손봉, 자봉, 봉래산 정상의 방향을 가리키는 좁은 오솔길로 들어섰더니 곧바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낮은 산이지만 역시 쉬운 봉오리는 없는가 보다. 게다가 차츰 해가 먹구름을 뚫고 나오니 더워진다.

험한 길이라서 오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미로의 열대 밀림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여름철엔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산 허리둘레길이 더 인기가 있을 듯하다.


넓고 완만한 둘레길을 편히 걷다가 급경사 고바위로 오르니 힘들다.

인생사도 이러하리라. 쉬운 길만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보다 힘든 길을 헤쳐온 사람들의 가치와 보람은 더욱 커겠지. 고진감래 아니던가. 그들이 느끼는 단맛의 향기는 더욱 짙으리라


아래쪽에 학교 운동장이 4개나 보이고 멀리 아치섬과 태종산 뒤 태종대 입구의 타워까지 나타난다. 아마 천연잔디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캠퍼스가 고신대학교일 것 같았다. 오랜만에 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흐뭇해진다.


두 갈래 길, 오솔길을 조금 벗어난 곳에 전방이 확 트인 바위가 보이며 뒤에는 벤치를 설치해 놓아 11시 밖에 안되었지만 우리는 도시락을 펼쳤다.  

단골 반찬인 계란말이와 김치 외에 된장에 절인 아삭 고추가 더해졌으니 오늘은 진수성찬이다. 더구나 멋진 경치가 더할 수 없는 조미료이다.


부산 시내의 산이라 주말에는 사람이 붐벼서 먹을만한 장소가 있을지 걱정했는데 참 멋지고 조용한 곳이다.


이렇게 경치 좋은 장소마다 벤치를 설치해 마치 아파트 발코니처럼 조망하고 간식을 즐기도록 배려한 지자체의 정성이 대단해 보인다.


점심 후 천천히 산등성이를 올라서니 거의 사방의 바다가 다 보인다. 좌측은 자갈치에서 송도와 멀리 다대포까지, 우측은 동삼동 부산대교와 오륙도, 해운대까지 조망된다.

가히 최고 경관을 볼 수 있는 명산이다.


숨어있던 경치가 하나씩 드러날수록

마음속 한편의 기억들이 튀어나온다.


스무 살 때 자갈치에서 갯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남항동 친구집이 나오고 대저택이었던 친구집 2층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정든 아지트였었다.


목장원 아랫길의 바다가 보이는 풍광 좋은 아카시아집(?)에도 자주 모여 즐겁게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불렀었다. 안개비가 잦았던

그때 그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또 한 친구 따라 동삼동 바닷가에도 가끔 갔다. 그곳에는 신문 보급소를 운영하는 친구의 중학 동기가 있었으며, 그 당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던 동네를 가가호호 방문해 신문확장 일을 도와주며(실제 피해를 주었을 수도), 막걸리를 얻어 마신 기억이 많다. 그 보급소장님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익어가고 계실는지!


아내와 함께 아치섬으로 한여름밤에 둘째의 기타 연주회를 보러 갔던 기억도 난다.


1차 목표점인 손봉(361m)을 향해 올라왔으나 봉을 보지 못하고 자봉(387m)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분명히 내가 올라왔던 길에 표시석이 있다고 한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놓친 시간 공간 인연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또 아쉬워했을지를 생각해 보며 나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하지만 우리는 한 길만의 삶이라 그게 보석인지 돌인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지나온 것은 지나온 대로 의미가 있으리라~'는 노랫말처럼, 최선을 다해 온 지금의 현실에 만족해야지.


자봉에서 정상(395m)까지 고도차는 8m인데 내리막 오르막을 합쳐 1km쯤 되는 것 같다.

작은 산이라 스틱도 가져오지 않고 올라가지만 큰 산의 축소판이다. 역시 쉽고 힘든 건 마음의 문제인가 보다.


정상의 전망대에서 부산 살면서 처음 영도에 왔다는 부부와 이야길 나누며 함께 함지골수련원으로 하산했다.


숲길이 끝날 때쯤 식용 적합의 약수터 수도꼭지 두 곳에 물이 철철 흐른다. 팔과 머리를 물에 담그니 정신이 번쩍 든다.


도로를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하늘정원, 사격장을 거쳐 내려오는데 옛날 아카시아집(?)이 보이질 않는다. 작은 흔적도 없다. 추억 속 그 집은 그대로인데.


흰여울 문화마을을 거쳐 내려와 남항대교 밑에서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다리 밑에는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바닥에 앉아 술도 마시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쉬고 있다. 역시 여름철 다리 밑이 최고의 피서지이다.


오늘 근교 산을 멋지게 탔다. 그늘도 많아 여름 산행지로 안성맞춤이었다.


2년여 전쯤 '홈컴잉데이' 행사를 끝낸 후에 회장 친구가 사준 남항동 붕장어탕 맛집이 생각났다.

기억을 더듬어 겨우 찾아가서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귀가하였다.

(아~ 벌써 그 좋았던 날의 행사도 옛날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202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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