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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 재 Jan 23. 2023

눈 내리는 설날 아침

밥을 지어 먹으며 


한국과 14시간 시차가 있는 이곳에도 설날 아침이 밝았다. 함박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다. 거센 겨울 바람이 흔한 애크론에 사선으로 날리는 폭설이 아니라 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함박눈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매주 토요일이면 만나서 1시간 반여 대화를 나누는 샌디와 어제도 만나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즐겼다. 마침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데 한 젊은 커플이 먹고 있는 음식이 맛나 보여 나도 그것으로 시켰다. 집에서는 절대 해 먹을 일 없는 크림으로 속을 꽉 채운 와플. 와플과 두쪽 와플 사이에 딸기를 썰어 넣은 후 크림을 잔뜩 채우고, 그것도 모자란지 와플 위와 와플을 담은 접시 양쪽 옆 빈자리에도 여분의 크림이 잔뜩 담겨 있었다. 게다가 시럽까지 별도의 작은 컵에 그득 담아 서빙이 되었다.


안그래도 달달한 음식에 시럽까지 수북히 끼얹어 달콤함의 극치를 만끽하며 평소와 달리 한접시를 다 비웠다. 레몬 조각을 띄운 홍차와 함께. 


그러나 오후부터 배가 더부룩하고 가스도 차면서 기운이 점점 빠졌다. 저녁 시간이 되어 남편과 함께 콘드비프 샌드위치에 그릭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점심 음식도 몸에 좋지 않았는데, 거기에 고기를 채운 샌드위치에 차거운 야채 샐러드까지 먹었으니 몸 상태는 안봐도 비디오가 되어 버렸다. 배가 아픈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서 기분이 가라 앉았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배 상태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속은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핑계김에 늦은 시간까지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더니, 입에 단 음식은 몸에 해롭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의사 친구로 부터, 또 한국의 내과 의사 선생님께서도 밀가루 음식, 단 음식, 기름진 음식 먹지 말라는 충고를 하셨다. 나 또한 그러한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가 잘되지 않고 몸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그 음식을 주문할 때부터 나는 그 음식이 불러올 사태를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이 예민해지는지 몸에 안 맞는 음식을 먹으면 오래지 않아 증상이 바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평소에 안먹으려고 노력했던 음식들을 레스토랑에서 보면 유혹에 넘어가버릴 때가 종종 있다. 



주역의 27번째 괘는 이()괘(산뢰이, 山雷頤) 이다. 이괘를 보고 있으면 마치 위아래 턱 사이로 졸졸이 난 치아의 형상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도 그 형상에서 취한 괘라고 한다. 가장 아래와 가장 위의 양효는 위와 아래 턱을, 가운데 음효들은 윗치아와 아랫치아를 형상화했다. 


이괘는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기름(養,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괘이다. 자기를 기를 뿐 아니라 남을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입은 음식을 먹으며 몸을 기르는 기관이자 동시에 말을 하는 기관이다. 먹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성장케 하는 기본 요소가 아니던가.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나를 기른다는 생각은 해보질 않았다. 배가 고프니 먹었고, 먹고 싶으니 먹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음식을 먹는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그리고 나서는 이유식을, 그리고 자연스레 일상의 음식으로 단계를 밟아간다.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로 음식을 잘게 자르고, 침 속의 소화효소인 아밀라아제와 잘 섞인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 위와 장기를 거치며 영양소가 몸에 흡수된다.  흡수된 영양소는 우리의 몸을 성장하게 하고,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나는 매일 하루 2~3끼의 식사를 하면서도 먹는다는 것에 대해 무신경했다. 나를 기르기 위해서 먹는다기 보다 때가 되니 먹었고, 맛 있는 음식은 절제를 하지 못하고 탐닉하며 과식도 했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인 것을 알면서도 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먹었다가 어제와 같은 탈이 나기도 한다. 


이괘를 보면서 나의 탐식과 과식을 반성했다. 탐식과 과식은 기름을 위해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잘 성장하여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의 음식이 되어준 동물과 식물의 고마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자기를 죽여 사람을 기르는 음식이 되어준 식재료들. 한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음식은 온전히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생명체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의 성장에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음식은 기본이고, 나를 길러주신 부모님, 또 스스로 성장을 위해 애쓴 나 자신, 가족, 학교 선생님들, 사회 생활에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 그리고 이제 한 인간으로 잘 길러진 나도 누군가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괘를 공부하면서 음식에 대해서도 겸허해 졌지만, 성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질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을 동시에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속이 여전히 편치 않아서 흰쌀밥에 각가지 야채와 두부를 넣어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설날 아침에는 떡국을 끓여 먹으려 했는데, 밥에 약간의 총각 김치와 배추 김치, 된장국으로 속을 달랬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 그것은 한 그릇의 밥과 국, 김치가 아니던가. 속이 좀 진정이 되고 나면 떡국을 끓여 먹을 것이다. 한 그릇의 떡국은 타국에서도 한국의 설날을 생각나게 하는 또 하나의 소울 푸드니까! 



100여년 전의 설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오랜만에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꺼내 보았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 시대였지만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설빔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어여쁘기 그지 없다. 


엘리자베스 키스,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

엄마와 두 아이가 정월 초하루에 경복궁 나들이를 했나보다. 뒤에 북악산을 배경으로 경복궁과 해치상이 보인다. 해치상 아래로도 사람들이 모여있다. 날씨가 꽤 추운 날이었나보다. 엄마와 두 아이의 옷이 대단히 따수워 보인다. 눈이 많이 내렸는지 북악산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광화문과 해치상이 있는 광화문 앞길이 온통 하얗다. 대기가 흐릿한 것으로 보아 다시 눈이 내릴 모양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한국의 어린이들>, 1920

안에 푸른 안감을 댄 빨간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고 데님까지 착용한 남자 아이의 모습이 의젓하다. 가운데 여자 아기가 막내일까? 똑단발에 얌전히 손까지 포갠 어린 여아가 참으로 귀엽다. 오른쪽 여아는 장녀다운 위풍당당함이 있다. 겨자색 치마에 색동저고리, 머리에 조바위까지 쓰고 한껏 갖춰 입은 아이의 모습을 보니 이 아이들의 집안이 꽤나 살림이 넉넉한 집안인 모양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두 명의 한국 아이들2>, 1925

기와 대문의 위용과 아이들의 옷, 문 아래로 이어지는 초가지붕들의 대비로 보아 이 집도 꽤나 지위가 있고 넉넉한 집안인 모양이다. 어린 동생이 갖춰 입은 풍성한 바지가 몸에 꼭 맞게 입은 색동 저고리와 대비되어 참으로 패셔너블하다. 통통하고 발그레한 볼에는 아직도 젖살이 그대로 남아있다. 누나와 손을 맞잡은 모양이 정겹다. 두 어린 아이 뒤로 아이를 업고 머리에 물동이를 인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여성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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