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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 재 Dec 24. 2023

산책길 철학하기!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다보면 허리병이 생길 때가 있다. 예전 직장생활하던 시절, 종종 허리병이 생겼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면 나는 동네에 있는 300여 미터 높이의 불곡산에 등산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산 정상에 있는 약수터까지 갔다가 돌아 내려 오면 약 1시간 가량 걸렸다. 연달아 3일 정도 등산하고 나면 허리병이 깨끗이 나았다. 평소 쓰지 않던 허리 근육을 쓰고, 또 암석도 타고 울퉁불퉁한 길도 걸으며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면 발바닥이 지압도 되었다. 그러면서 뭉쳤던 허리 근육이 풀렸던 것인지 등산은 허리병에 직효였다. 


최근에 허리병이 왔었다. '가볍게 등산만 해도 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내가 사는 애크론에는 산이 없다. 평소 걷는 평지는 아무리 걸어도 허리병이 낫질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경사길을 찾아보았다. 애크론에는 산은 없지만 언덕진 지형은 많아서 산과 같은 급경사는 아니더라도 경사길이 제법 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나의 새로운 산책 루트가 되었다.


위 아래로 길게 놓여있는 두 개의 대로를 중심으로 두 대로를 위 아래로 연결하는 경사길이 여러개 나있는 곳이다. 나는 이 경사길을 오르락 내리락 걷는다. 그 중 가장 경사도가 가파른 두 개의 경사길 만큼은 꼭 걷는다. 그 정도는 되어야 무릎 근육과 허리 근육이 골고루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약간 숨이 찰 정도의 경사길이다. 이 경사길들을 걸어서 그랬던지 오래지 않아 허리병이 나았다. 


허리병은 나았지만 나는 이 길을 하루 걸러 한번씩 산책한다. 나는 이 길이 그냥 좋다. 이 산책 루트가 신화적이라면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라면 종교적이며, 철학적이라면 철학적인 사유를 하게 한다. 이 산책로와 그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공원묘지 때문이다. 두 개의 대로 중 아래쪽 대로의 이름이 "Aqueduct St."이다. "수로"라는 뜻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길 위쪽은 민가이고, 길 아랫쪽은 공원묘지이다. 민가와 묘지가 수로를 공유하며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만들고 있다. 길 윗쪽이 차안이라면 길 건너 맞은 편은 피안인 셈이다.


길게 이어진 길이 Aqueduct St. 오른쪽으로 넓게 공원묘지가 자리한다.




미국의 공원 묘지는 도시 안에 자리한다. 미국 뿐 아니라 캐나다의 도시 속 공원묘지들은 우리의 봉분식 무덤이 아니라 평장을 하여 비석만 우뚝우뚝 서있다. 각 비석들은 디자인이 다양하다. 넓은 부지에 구획정리를 잘하였고, 또 세월이 오래되었는지 아름드리 나무들도 많다. 곳곳에 정원도 잘 가꾸어 놓아 철되면 꽃도 풍성하게 핀다. 이렇다 보니 반려견과 함께 묘지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공원묘지 안에까지 들어가서 산책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원묘지를 조망하며 걷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스친다. 


두 대로 사이에 난 여러 경사길들을 걸어내려 오다 보면 어느 길에서건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때로는 경사길을 걷지 않고 Aqueduct를 따라 길게 걸으며 내내 공원 묘지만 보며 걷기도 한다. 매번 이 묘지공원을 볼 때마다 이 곳이야 말로 "Vanitas"를 배울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인생 헛되고 헛되도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정물화가 담고자 했던 가르침이 바로 이 바니타스였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Vanitas는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허무주의도, 염세주의도 아니다. 동양적 사유이다. 만사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순리라 배우지 않았던가. 때되면 누구나 돌아가야 하는 곳. 그곳이 자연이고 흙이라 느낄 뿐이다. 언젠가 나도 가야할 곳. 그것이 무에 그리 허무하며 염세적인가. 


경사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원묘지




며칠 전, 그날 아침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기가 막힌 신화적 순간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나온 햇살이 공원묘지 한쪽으로 떠올라 있었고, Aqueduct 위에 누가 버린 것인지 계란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3박자 - 햇살, 물, 알 - 가 갖추어졌다. 스토리텔링이 완성되었다.  


길 한쪽에 떨어져 있는 계란 박스




선사시대. 아마도 여신숭배가 보편적이었을 때였을 것이다. 삶이란 직선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명의 본향 (깊은 땅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이 세상으로 회귀했다. 무덤 속의 죽음은 새 생명을 위한 씨앗이었다. 이 씨앗에 햇살이 비추고 비가 뿌리면 새 생명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가 바로 이것에 기반한 신화이다.)


따라서 무덤은 떠오르는 해의 생명력을 받아야 하는 곳에 위치했다. 선사시대 거석 무덤들이 남아있는 장소들을 보면 무덤의 출입구가 동지의 해돋는 방향과 축이 맞춰져 있다. 새 생명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동지날, 그 동짓날의 햇살이 무덤 속 가장 안쪽까지 쑥 들어오도록 만들어졌다. 햇살이 혼령들을 깨워야 하는 것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가 떠오르는 아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햇살이 가진 에너지도 필요하지만 생명수도 필요하다. 물. 만물의 근원이라는 물. 만 생명이 바닷물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아프로디테가 바닷물에서 태어나는 것은 그냥 나온 스토리가 아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랑을 불러 일으켜 만 생명을 낳게 하는 여신. 그 사랑의 여신 조차도 바다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하필 공원묘지 앞의 대로 이름이 "Aqueduct", 즉 "수로"이다. 태양의 에너지와 함께 생명의 진수인 물까지 풍성히 갖추어져 있다. 


이제 생명의 씨앗만 있으면 된다. 생명의 씨앗인 알. 알은 태양 에너지와 물을 자양분 삼아 곧 깨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알은 깨어났나 보다. 버려진 계란 박스가 텅비어 있는 것을 보니 그 박스에 담겼던 생명의 씨앗들이 벌써 태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나 보다. 세계의 여신 신화들을 보면 여신이 새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자 임신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직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여 새 생명을 잉태하는 원리를 몰랐던 옛사람들의 상상이 바탕이 된 신화일 것이다. 생명의 씨앗은 여성의 자궁 속 촉촉한 물기 속에서 성장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그날 아침, 완벽한 신화적 스토리가 완성되었다. 너른 공원 묘지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소설 제목으로도, 김민기가 부른 노래의 한 대목으로도 남아있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가 저절로 되뇌여 지는 아침이었다. 게다가 수로 위에 떨어진 계란박스까지!


자연 속에서 지천으로 자라나는 꽃과 나무와 야생 과실과 야생 곡식으로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었던 선사시대. 그 시대의 세계관은 분명 현대와는 달랐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들판은 텅 비어 만 생명이 죽은 것 같았는데, 봄이 되어 햇살이 넉넉해지고 비가 뿌리면 만물이 다시 소생했다. 세상의 만물이 그렇듯 내가 죽는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 다시 나는 부활할 것이었다. 그 세계관이 신화에 반영된 것이다. 


나는 이 신화가 좋다. 내가 죽고 나서 다시 이 세상으로 회귀할지 말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냥 종말론 보다는 회귀론, 순환론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죽고나면 우리의 몸이 분해되어 우주의 원자로 돌아가지만 언젠가 이 원자들이 다시 결합하면 새로운 생명의 근간이 된다고 하니 회귀론이든, 순환론이든 그것을 무어라 부르든 아주 틀린 말도 아니란 생각이다. 


전세계 많은 문화권에서 새해의 첫날로 기념했던 동지. 동지가 지났다. 새로운 탄생을 해야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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