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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 재 Sep 24. 2024

⟪리어왕⟫ 다시 읽기

리어왕을 볼 때면 기업의 임원으로 부하들과 비서를 부리며 자기 손으로는 직접 허드렛일을 해보지 못한 채 은퇴한 초로의 남자가 떠오른다. 그렇게 은퇴한 사람은 전화도 걸 줄 모르고, 하물며 은행에 가서 돈 찾을 줄도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부인의 보살핌을 극진하게 받다가 부인이 먼저 떠난 이후 어떻게 가스불을 켜는지, 어떻게 세탁기를 돌리는지도 몰라 일상이 무너지는 남자들도 있다고 하고, 반대로 남편의 그늘 아래에서 남편과 도우미의 보살핌을 살뜰히 받다가 남편 떠난 후 인생이 무너지는 부인들이 있다는 기사도 종종 접했다. 


대개 그런 높은 직급의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히 잘난 줄 알고 사는 경우가 많다. 자기 한마디면 모두가 굽신거리고, 모두가 자기를 대우해주니 자기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가 그 직위를 떠나서도 여전히 그런 대우를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단한 착각이다. 사회생활에서만 그런가? 가정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찌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대우 받으며 살 생각을 한 노인들이 결국 찬밥 신세가 되어 인생을 후회 속에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왕왕 들었다. 부모 재산 곶감 빼가듯 하나 하나 빼가는 자식도 있으니 그런 자식도 잘 막아내야 하지만 내 재산 미리 자식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인생을 후회 속에 살지 않도록 노후에 더욱 지혜로워져야 할 것이다.


리어왕! 그가 위에서 말한 전형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한다. 왕으로서 권세와 부를 누렸다. 딸자식 셋으로 부터 사랑도 받았다. 나이 80이 되고 보니 은퇴를 하고 싶다. 은퇴를 앞두고 딸 셋에게 권력과 재산을 나눠주려 한다. 그리고 노후를 세 딸네들 궁을 번갈아 다니며 살겠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묻는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 크기 만큼 내 재산과 권세를 물려주겠다고 한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막강한 권세와 재산을 자식들의 말잔치에 걸고 나눠주겠다니. 그러기 전에 그는 딸들의 성정을 판단하고 역량을 파악해서 능력에 걸맞게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어야 했다. 그렇게 권력과 재산을 나눠 주더라도 가장 중요한 권력의 한 축은 그가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가 이후에 겪는 일은 자업자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줄거리


그는 한 나라의 군주였다. 자기의 판단에 자기의 삶 뿐만 아니라 한 가정, 한 나라의 안위도 걸려 있음을 정말 몰랐단 말인가? 그는 달콤한 말에 속아 자기를 사랑하는 막내딸 코딜리아를 내치고, 또한 그를 진정으로 받드는 켄트 백작을 내쫓았다. 그리고 욕망에 얽매인 인간들에게 자신을 맡겼다. 그런 인간이 리어를 제대로 보필해 주었겠는가! 그들의 냉대에 미쳐가는 리어는 가정사도, 국사도 모두 망가트리고 말았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 <코딜리아의 몫>, 1866, (사진출처: en.wikipedia.org)




리어왕과 세 딸의 스토리와 더불어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 에드가, 에드몬드 이야기도 동시에 진행된다. 서자 에드몬드의 욕망 앞에 아버지 글로스터의 삶은 처참히 망가지고, 에드몬드의 음해에 적자 에드가는 아버지로 부터도 내쳐지고 온갖 풍상을 겪는다. 


작품의 막바지에 이르면 리어왕을 냉대한 두 딸과 아버지와 형을 희생시킨 에드몬드의 몰락이 시작된다. 그들의 몰락은 자기들을 일으켜 세웠던 욕망이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치게 되는 상황에 내몰리며 모두 죽음을 맞고 만다. 큰딸 고도널과 둘째딸 리건은 서로 에드몬드를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이던 와중에 서로를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적자 에드가는 아버지와 자신의 고난을 초래한 것이 에드몬드임을 알고 그와 결투를 벌여 에드몬드를 죽임으로써 이 집안의 일도 정리가 된다. 이렇게 악인들의 결말은 권선징악에 맞게 끝이 난다.


그런데 권선징악과 맞지 않는 결말도 있다. 프랑스왕과 결혼한 이성적이고 자존감 높은 막내딸 코딜리아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쳐들어 오고, 이 전쟁에서 오히려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한다. 리어는 다시 왕권을 되찾지만 왕권을 되찾자 마자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비극으로 삶을 마감한다. 아버지 리어가 현명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폭풍같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가장 사랑하던 딸 코딜리아를 잃었다. 거센 폭풍이 한 가정이자 한 나라의 왕실에 큰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거센 욕망의 폭풍, 또 욕망이 불러일으킨 정치적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는 악한 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들도 세상을 떠났고, 결국 남은 자들에게는 이 사태를 뒷수습하는 일만 남았다.


어리석은 왕, 리어! 감언이설과 교언영색에 빠져 진정으로 자기를 섬겼던 막내 딸 코딜리아와 캔트백작을 내쫓았으나 오히려 그들이 그를 끝까지 보필했고, 그에게 심장이라도 꺼내줄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그를 철저히 내몰았다. 궁궐 속의 그가 광야로 나가 폭풍우를 맞아보고 나서야 민중의 고통에 찬 삶도 알게 되고, 어느 딸과 어느 신하가 진실했는지도 깨닫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이다.



민중의 삶을 모르던 위정자들


리어와 캔트 백작, 글로스터 백작, 에드가 등 궁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며 살다가 상황에 내몰려 광야로 쫓겨나 온갖 풍상을 겪고 나서 내뱉는 대사들을 보면 기가 막힌다. 한 나라의 위정자들이 그토록 민중의 삶을 몰랐단 말인가? 배고픈 고통, 추위 속에 헐벗고 사는 고통, 폭풍우 속에서 머물 곳 없이 광야를 헤매는 고통. 삶의 기본적 요소인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겪는 민중의 고통을 전혀 몰랐던 위정자라니! 마침내 겪어보고 나서야 마치 깨달은 현자처럼 쏟아내는 말들을 보면 이건 위정자로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능력도, 덕도 없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위정자로서 그것을 몰랐으니 당신들이 겪는 고통은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셰익스피어 역시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그 점이 아니었을까.



관객들의 요구를 반영한 또 다른 판본


내가 읽은 판본을 번역한 이미영 교수(백석대 교수)의 해설에 의하면 리어왕은 1604~1605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도 여러 원전에서 내용을 빌려왔는데, 특히 "1590년대에 공연되고 1605년에 뒤늦게 출판된 <레어왕 King Leir>은 그 중 가장 중요한 원전"이다. 단 결말이 다른데, 레어왕에서는 리어와 코딜리아가 해피 엔딩을 맞는다면, 리어왕에서는 코딜리아와 리어가 비극적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 리어왕이 가진 권선징악에서 벗어난 결말이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주어 Nahum Tate가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번안한 극이 약 150여년간 공연이 되었단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원안대로 공연이 되고 있다. 


나는 이런 해피엔딩 결말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드라마 작가들이 시청자들의 요구에 의해 결말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리어왕을 보는 많은 관객들의 마음도 우리와 같았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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