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희곡 다시 읽기
* 이 작품은 신상웅 교수 (중앙대) 번역의 동서문화사 출판본으로 읽었다.
내가 처음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은 것이 10대 후반이었는지 20대 초반이었는지 분명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때 가장 쇼킹하고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작품이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왠지 모르겠다.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없었는데도 이 작품 만큼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하여 감탄하며 읽었다.
작품 안에는 결혼을 앞둔 젊은 청춘남녀의 변화무쌍한 풋사랑도 있고, 결혼식을 앞둔 젊은 군주의 사랑도 있고, 자식에 대한 집착적인 아버지의 사랑도 있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요정들의 사랑도 있다.
작품 구성
이 작품은 3단 구성 체제를 하고 있다. 가장 윗 층은 아테네의 공작이자 군주인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을 앞두고 벌어지는 결혼식 준비 및 결혼식 피로연에서 공연할 연극 준비 이야기이다. 두번째 층위로 젊은 청춘남녀 두 커플의 엇갈린 사랑이 제자리를 잡아가며 벌어지는 옥신각신하는 사랑 이야기이고, 세번째 층위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요정왕과 왕비가 청춘남녀를 도와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및 요정 왕이 왕비를 질투하여 벌이는 요정 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세 층위의 이야기가 각각의 층위에서, 또 다른 층위와 오고가며 이야기를 엮어 간다.
줄거리
공간적 장소는 아테네이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공작으로 히폴리타와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나흘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을 앞두고 의전관에게 결혼식을 마친 이후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즐길 수 있는 볼거리를 만들어 보라고 명령을 내린다. 극 중 극으로 공연될 피라모스와 티스베가 바로 이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공연될 것이다.
이 한여름 밤의 꿈에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무시로 섞여 들어가 있다. 우선 테세우스는 크레테의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영웅이다. 그리고 히폴리타는 아마존족의 여왕으로 신화에서는 테세우스에게 잡혀 그와 결혼하여 아들 히폴리토스를 낳는다. 이 작품에서는 결혼할 약혼녀로 등장하고 있다.
테세우스 앞에 아이게우스(원문에는 Egeus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번역자 신상웅은 아이게우스라고 번역했다. 아이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의 아버지이다.) 라는 신하가 4명의 청춘남녀를 데리고 등장한다. 그의 딸 헤르미아가 곧 결혼을 한다고 테세우스에게 인사를 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4명의 청춘남녀의 사랑이 몹시도 심각하게 얽혀있다. 헤르미아는 데메트리우스라는 청년과 약혼한 사이지만 리산드로스와 사랑에 빠져 있다. 그런데 데메트리우스는 헤르미아의 친구인 헬레나에게 빠져 그녀에게 구애했고, 헬레나는 데메트리우스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그를 신처럼 받들고 있다. 그런데 헬레나가 데메트리우스를 좋아하면 할수록 데메트리우스의 마음이 점점 떠나 마침내 헬레나를 싫어하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리산드로스와 데메트리우스 두 사람이 모두 헤르미아를 사랑하고 있다. 헬레나는 한없이 슬프다. 사실 헬레나와 리산드로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무슨 사연인지 리산드로스의 마음이 헤르미아에게로 돌아섰기에 헬레나는 두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셈이다.
오베론과 티타니아는 요정 나라의 왕과 왕비이다. 그런데 이들 사이가 조금 틀어져 있다. 티타니아 왕비가 인도에서 데려온 한 소년에 빠져 있는데, 오베론이 그것을 몹시 질투하여 티타니아에게서 그 소년을 뺏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베론은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일도, 요정계에서 벌어지는 일도 모두 알고 있다. 심부름꾼 퍽을 시켜 요정계의 일도, 인간계의 일도 모두 보고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약초에 해박한 그는 약초를 가지고 눈에 바르는 약즙을 만들게 한다. 그것을 잠 든 사람들의 눈꺼풀에 바르면 다음 날 눈을 떠서 처음 보는 상대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약이다. 오베론은 그 약즙으로 4명의 청춘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바로 잡아 주려고 한다. 또 어린 인도소년에게 빠져 있는 부인 티타니아 왕비에게도 꽃즙을 발라 골탕을 먹이려고 하는 중이다. (티타니아 왕비와 나중에 피로연에서 연극을 공연할 멤버 중 한명인 보텀과의 사랑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오베론은 퍽에게 약즙을 주며 숲 속에서 만났던 데메트리우스의 눈에 바르라고 한다. 데메트리우스가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네명의 청춘 남녀의 엇갈린 사랑은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퍽이 그만 데메트리우스가 아닌 리산드로스의 눈에 꽃즙을 바르고, 하필 다음 날 눈을 뜬 리산드로스가 처음 만난 여성이 헬레나였다. 퍽의 실수를 알게된 오베론 왕은 이번에 자기가 직접 데메트리우스의 눈에 꽃즙을 떨구는데, 깨어난 그가 처음 본 여인 역시 헬레나였다. 이젠 두 남자가 동시에 헤르미아가 아닌 헬레나에게 빠져서 구애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갑자기 변한 두 남자의 태도에 헬레나는 더 비참해진다. 두 남자와 헤르미아가 동시에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명의 청춘 남녀가 서로를 쫓고 쫓기는 와중에 모두 지쳐 잠이 들고, 퍽은 다시 헤르미아와 리산드로스에게 약즙을 발라 4사람의 사랑의 행로를 올바르게 맞춰준다.
극 중 극,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 작품에는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연극 공연을 할 연극 팀에 관련한 이야기도 길게 나온다. 정식 연극배우들이 아닌 기술자들(목수, 직조공, 풀무 수선공, 땜장이, 재단사, 가구장이)인 사람들이 어떤 배역을 맡으며 어디에서 어떻게 연습할 것인지, 또 연극에 필요한 무대 장식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의논하는 장면이 있다. 읽다보면 요즘 초등학교 학예회도 이 수준을 훨씬 넘는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난다. 그러나 이들은 참으로 진지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의 공연이란 것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온갖 최첨단 기술이 난무하는 요즘의 무대 예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소박하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애정이 가는 대목이다.
마침내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이 거행된다. 더불어 두 커플 헤르미아와 리산드로스, 헬레나와 데메트리오스 커플도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와 함께 공동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피로연 시간이 되었고, 군주 테세우스는 피로연에서 볼 공연 리스트를 보고 그 중 한 팀을 고른다. 그렇게 뽑힌 연극 극단이 <피라모스와 티스베>를 준비한 팀이고, 그들이 그 연극을 한다.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셰익스피어가 비극 ⟪로미오와 쥴리엣⟫을 쓸 때 참고로 한 동방의 신화이다. 담 벼락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두 가문의 청춘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밀어를 속삭인다. 어느 날 저녁 두 사람은 동구 밖 우물가에서 만나기로 한다. 우물가에는 뽕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먼저 도착한 티스베는 우물가에서 피라모스를 기다린다. 그런데 사자 한마리가 사냥을 마치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우물가로 어슬렁 거리고 온다. 놀란 티스베는 근처 동굴로 급히 피한다. 그런데 도망가는 중에 망토를 떨어뜨린다. 사자가 그것을 피 묻은 입으로 찢어 발기며 피를 잔뜩 묻혀 놓는다. 물을 마신 사자는 떠나고 뒤이어 피라모스가 우물가로 온다. 피가 묻은 채 찢겨 있는 망토를 본 피라모스는 티스베가 사자에게 잡아먹힌 줄 알고 차고 있던 칼로 자살한다. 뒤늦게 우물가로 돌아온 티스베는 죽은 피라모스를 보고 그가 죽은 칼로 자기 가슴을 찔러 죽는다.
그리스 신화가 속속들이 배여있는 <한여름 밤의 꿈>
작품을 읽다보면 이것이 그리스 신화인지 셰익스피어의 작품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리스 신화가 곳곳에 배여있다. 번역자 신상웅 역시 주인공들 이름을 영어식이 아니라 그리스 식으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 Lysander를 그리스식으로 리산드로스로 번역했고, Hermia를 헤르미아라고 번역했다. 그 뿐 아니라 주인공들 이름 부터가 그리스 신화에서 온 이름도 있다. 테세우스와 히폴리타는 아예 신화 속 이름이고, 헤르미아의 아버지 Egeus도 아마 테세우스의 아버지 Aegeus에서 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작품 안에도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자주 인용된다. 사랑과 관련하여 큐피드(에로스)와 비너스(아프로디테)가 인용되고,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트로이의 왕족 아에네아스와 카르타고 여왕 디도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번역에 실수가 있어서 지적하고 싶다. (번역자님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실수이기에 바로 잡았으면 해서 지적하는 것이다.) 1막 1장의 헤르미아의 대사 중에 “저 불성실한 트로이 사람 아이게우스가 돛을 달고 떠나는 것을 보고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몸을 내던졌다는 불에 걸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아이게우스가 아니라 트로이의 왕족인 아에네아스(Aeneas)가 맞다. 원문을 찾아보니 원문에는,
“by that fire which burn’d the Carthage queen
When the false Trojan under sail was seen,” 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에는 사람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신분만 밝혀 놓았다. 그것을 번역자는 독자가 이해하도록 이름까지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의 아버지이자 아테네의 왕으로 트로이 사람이 아니다. 또 디도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나중에 로마의 건국의 바탕을 놓는 아에네아스이다. 그는 트로이가 몰락하자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카르타고를 거쳐 지금의 로마 근교에 터전을 잡은 사람이다. 따라서 아이게우스를 아에네아스로 수정해야 한다.
또 의전관이 결혼식이 끝난 후 피로연에서 공연할 연극 리스트를 테세우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 중 하나를 테세우스가 고르면 뽑힌 팀이 연극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리스트가 <피라모스와 티스베>만 빼고 모두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들이다. 리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괴물 켄타우로스족과의 전쟁. 이에 대해 테세우스는 사촌 헤라클레스의 무훈을 자랑할 때 히폴리타에게 벌써 이야기 한 적이 있다면서 건너뛴다. 2. 술의 신 바쿠스를 제사 지낼 때 신도들의 노여움, 트라키아의 시인 오르페우스를 찢어 죽인 이야기. 이에 대해서도 테세우스가 지난번 테베에서 개선했을 때에 이미 구경했다면서 패스한다. 3. 최근 궁색하게 죽은 현인을 애도하는 9명의 뮤즈 여신. 이것은 가혹한 풍자라서 피로연에는 부적절하다고 패스한다. 그리고 고른 것이 바로 <피라모스와 티스베>였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훨씬 더 재미있게 읽힐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그가 얼마나 고대의 신화에 푹 젖어 있었는지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리스 신화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극 중 극 <피라모스와 티스베>는 동방의 신화이다. 또 북유럽 신화 속의 요정들이 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이끌어간다. 당시의 이 연극을 관람했을 관객들은 요정들의 역할에 환호하면서 보았을 것이다.
곁다리 이야기
이 작품에는 갖가지 꽃과 약초 이름이 나온다. 셰익스피어가 꽃과 약초에 해박했던지 그의 작품들에 식물 이름이 많이 거론된다. 특히 이 작품에는 더 많이 나온다. 요정왕 오베론이 갖가지 꽃과 약초로 약즙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엇갈린 사랑을 교정해 주고, 또 아내 티타니아 왕비를 골려주는 매개로 사용하기도 한다. 티타니아 왕비와 그녀를 모시는 요정들의 모습이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묘사가 되어 있다. 혹시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 언급되는 꽃, 나무, 약초 등에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면 <보태니컬 셰익스피어>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관련 대사와 해당 식물 그림을 모아놓았다
⟪한여름 밤의 꿈⟫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영화는 미셸 파이퍼가 티타니아 왕비 역할로 나온 영화였다. 작품 속 분위기를 참으로 잘 살려내었다고 생각하면서 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인도에서 온 소년을 인도의 신 시바로 표현한 것은 아주 멋진 각색이었다. 시바신은 독을 마시다 목에 걸려 몸이 푸른색으로 변했기 때문에 푸른색은 그의 상징색이다. 영화에서 인도에서 온 꼬마가 바로 그 푸른색을 하고 있었다.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변화무쌍하던가! 젊은 청춘남녀의 변화하는 사랑의 감정을 요정의 장난에 의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지만 결혼을 앞둔 군주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약간 묵직하면서도 덤덤한 사랑, 그리고 오래 같이 산 부부를 연상 시키는 요정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투닥거림 등, 셰익스피어는 사랑의 다양한 양상을 넓게 펼쳐보여준다. 전체적으로 ⟪한여름밤의 꿈⟫은 한번쯤 꾸어봤으면 싶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아름다운 작품이다.
※ “한여름"을 뜻하는 ‘midsummer’는 하지 무렵을 일컫는다. 영국에서는 이 때 잔치를 벌이며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전통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날 밤에는 요정과 마녀들이 모여 굉장한 잔치를 연다. 이러한 전설과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는 하룻저녁 사이 숲 속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지만, 제목에 나온 그대로 한탄 꿈이며, 아침해가 뜸과 동시에 뒤집혔던 상황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책 해설 부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