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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르나 Nov 27. 2021

동물 농장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좋은 이유

근래에 책을 읽으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는 한번 읽은 책은 요약해두고 다시 보고 싶으면 요약한 부분만 보는 편이지 책을 다시 읽지는 않는다. 그마저도 줄거리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면 다시 읽는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상 거의 없다. 인문학이나 철학 등 이해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읽는 일은 제법 있었지만, 소설을 두 번 이렇게 시간에 간격을 두고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동물 농장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때 읽었을 때는 지금처럼 글의 내용이 확 마음속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솝 우화의 현실버전이랄까 대수롭지 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었을 때는 과거 대수롭게 여기고 넘어갔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다. 읽은 지 오래돼서 기억이 흐릿하지만 같은 책이 맞는 지 의심스러웠다.  매일 지나가던 익숙한 도로가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면 어색한 것과 같이 말이다.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동물들의 행동에서 그들의 심리를 알 수 있었고, 행동 하나 하나가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줄거리는 그리 어렵지 않다. 메이어 농장의 동물들이 자신들에게 강제로 노동을 시키고, 자식들을 가져다 팔아버리는 등의 활동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인간들을 증오했다. 늙은 돼지 한 마리가 인간들을 몰아내고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이로 인해 동물들은 적당한 때가 오면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우연히 생긴 혁명의 때를 동물들은 놓치지 않았고, 인간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들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동물들 중에 돼지들이 지능이 뛰어났다. 자연스럽게 돼지들이 앞장서서 새로운 농장의 운영과 동물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원칙들을 정하고 동물들 모두 거기에 따른다. 돼지들은 먼저 글을 익히고 쓰는 데에 집중했다.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돼지들은 서로 협력해서 한동안 농장 운영을 잘해나갔다.  돼지들 사이에서 농장을 위해 지향하는 바가  다른 두 부류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 두 세력은 처음에는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었다. 두 세력 중 하나의 수장인 나폴레옹이 9마리의 개를 부리며 다른 세력인 스노볼을 쫓아내면서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선 나폴레옹은 자신의 실정과 부정적인 자연 현상마저 도망친 스노볼에게 다 뒤집어 씌웠다. 과거에 인간들과 전투에서 싸웠던 공적까지도 동물들에게서 잊혀지게끔... 나폴레옹은는 점점 더 자신의 편의를 위해 다른 동물들의 희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혁명 성공 당시 모든 동물들이 정한 원칙들을 교묘하게 바꾸고 종국에는 아예 없애버렸다. 돼지들은 그들의 권력과 편의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닮아 가는 모습을 다른 동물들이 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내가 느끼기에 동물 농장 속 돼지가 권력을 얻는 데에 잘 이용한 건 정보의 불균형이었다. 돼지들은 문자를 터득하고 나서 정보를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왜곡하고 차단했다. 과거 인터넷이나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정부가 정보를 왜곡, 차단하면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국민들을 속였던 일들은 역사 속에서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과거보다 정보의 독점이 쉽지 않지만 정보의 왜곡은 쉽게 가짜 뉴스나 찌라시 등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한다. 스퀼러가 나폴레옹의 충복으로서 정보의 왜곡 및 차단을 동해 선동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선동에 영향을 받은 복서를 필두로 하는 동물들은 나폴레옹이 실정을 하고 있음에도 맹목적으로 믿게 만들었다. 주변의 모든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된 정보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 누구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정보의 불균형은 존재하지만 그 간극을 최대한 좁혀 놓은 게 인터넷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이 위대한 발명으로 논할 수 있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 내내 한가지 의문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과연 나는 '9마리 개' 를 눈 앞에 두고도 나폴레옹이 틀렸다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다.  동물들처럼 공포에 짓눌려 잘못된 일을 보고도 눈을 감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불의에 항거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목숨은 누구나 하나 뿐이고 죽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잘못된 것을 무시하지 않고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답을 딱 규정하고 생각하기를 끝내는 것 보다는 항상 머리와 마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야 비로소 때가 되었을 때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철학은 의문을 품고 그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닌 의문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우리도 한 사람의 철학자가 되어야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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