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고 마지막해 고3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고3들에게 '문법단위를 이용한 자기표현 에세이' 수행평가를 실시했었다. 이것은 내가 교사로서 진행한 마지막 과제였다. 이 과제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아이들 졸업 선물로 배부했었다. 그런데 책장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다시 읽으며, 제자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한다.
변칙으로 가득한 '사이시옷
2016년 고3 하나고 5기 안혜주
나는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데는 '눈빛이 무섭다.'부터 '언행이 거칠다.'까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과도하게 즉흥적이고 가끔은 반항적이어서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남이 정해준 규칙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려서는 하루에 아이스크림이 두 개 먹고 싶다거나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을 때면 몰래 집을 나가서 부모님께서 경찰을 불러야 했고, 중학생 때는 갑자기 파마를 하고 나타나거나 수업을 빠지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서 생활지도부 앞에서 머리채를 잡히곤 했다. 규칙을 어겨서 받는 벌보다는, 그를 어김으로써 내가 얻는 것들이 주는 기쁨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원래 별 것 아닌 일도 누군가 못하게 하던 짜릿해지는 법이다. 집 안의 반대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 것처럼.
중학생 때 내가 깨고 싶었던 규칙은 '학생은 용모가 단정해야 하고, 하교 전에 학교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와 같이 사소한 교칙이었다. 하나고에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초반에는 외부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정해진 시간 내로 귀사신고를 해야 한다 등의 규칙이 중학교 때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고 느꼈다.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숙사라는 제한적 공간이 나를 더 숨 막히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남이 정해준 규칙에 침묵하고 순종하면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반항했다. 그렇게 차차 벌점을 쌓기 시작했다. 그게 모여서 15점이 되고, 퇴사를 할 때까지 나는 지속적인 교칙위반자였다. 여기까지는 중학생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고 하나 달라진 점은, 내가 순종하고 싶지 않은 규칙의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칙이라는 좁은 범위의 규칙을 넘어서, 내신공부와 명문대 진학이 최우선적인 가치라는 사회의 암묵적 규칙까지. 특히 후자의 규칙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나고에 입학한 이후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옥죄어오는 진학에 대한 압박, 그로부터 파생되는 내신 경쟁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학교에서 쫓겨나지는 않아, 따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은 각종 대회와 동아리다. 그래서 나의 1,2학년을 그런 비교과 활동에 바쳤다. 그 결과 선생님들은 나를 '외부상은 많지만 공부를 참 안하는 안타까운 학생'으로, 친구들은 나를 '온갖 대회에서 상을 받아 오는 스피치머신', '일할 때 집중하면 무서운 친구'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비교과 활동들은 내가 선택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사람들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통해 정의한 나는 결국 진정한 나를 대변하지 못한다. 마치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이시옷 규칙을 정하고자 하지만, 너무 많은 변칙과 예외들로 인해 완벽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역시 외부에서 정해놓은 규칙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항상 발버둥치고 있고, 그런 나의 삶은 온갖 변칙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아무도, 나 역시도, 나를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정의되지 않은 사람은 사이시옷 현상처럼 어렵고 막막하지만, 그 역시 나의 특징이며 매력이다. 닦여진 길을 잘 걷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가지를 치며 길을 만들어내는 게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앞으로도 내 삶은 주류를 따르지 않는데서 오는 쾌감을 동력으로 열심히 달려갈 예정이다.
혜주 - 합창단을 만들어 운영할 때.. 알토 파트의 중심으로 함께 했던 친구이다. 항상 세련되게 화장을 하고, 여러 교칙 위반으로 벌점이 학교 최고 수준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문제 학생이어야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매우 당차고, 의리 있고, 똑똑했다. 발성부터 논리까지 완벽했던, 학교 최고의 토론여제이다. 국어국문을 전공하고, 강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동료로 만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