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고 마지막해 고3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고3들에게 '문법단위를 이용한 자기표현 에세이' 수행평가를 실시했었다. 이것은 내가 교사로서 진행한 마지막 과제였다. 이 과제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아이들 졸업 선물로 배부했었다. 그런데 책장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다시 읽으며, 제자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아름다움, 조사
2016 고3 하나고 5기 이다훈
갓 중학교를 입학했을 적의 일로 기억한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며 무작정교내 오케스트라 입단시험을 보러 간 날,선생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넌 무슨 악기를연주하고싶니?".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바이올린이요" 치열이 고르지 않았던 나였기에 관악기보다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중에서 손이 크지 않은 나로서첼로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남은 것은 바이올린과 비올라, 나는 당연히 바이올린을선택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비올라라는 악기는 음악시간에 이론으로밖에 들어본적이 없는 악기였다. 바이올린은 여성스러움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운고음의 선물을 자랑하고 첼로는 남성다움으로대표되는묵직한 저음의 울림으로 감동을 전하는 것에 비해 비올라는 무슨 소리를 자랑할 수 있는지 사실 의심스러웠다. 바이올린 독주회, 첼로독주회는 많이 들어보았어도 비올라 독주회는 무언가 귀에 익숙하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있어 비올라는 그저 이도 저도 아닌 악기. 혼자서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도 없고 그저 합주에 있어서 약간의 추가적인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악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악기로만 여겨왔다.
그렇게 바이올린을 고수한지 1년이 지난 시점,선생님께서는 나와 같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한 마디 던지셨다. 혹시바이올린에서 비올라로 전향할 사람이 없냐는 것이었다. 비올라를 연주하시던 선배님들이 이번에 다 졸업을 하시는 바람에 더 이상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연주를 할 학생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단호히 싫다고 했다.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바이올린을버리고 어정쩡한 비올라를 택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친구들 중 3명이 비올라를 배워보고 싶다고 손을 들었고 그 친구들이 비올라로 전향을 하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그 친구들을 비웃었다. 좋은 악기를 놓아두고 엉터리 악기에 손을 대려 한다고. 그 때 당시에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우리는 매주 토요일 아침 9시에 모여 전체 합주를 한다. 아침 이른 시간에 모이기 때문에 전원 출석은 고사하고 상당히 빠지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더욱이 그 날에는 시험을 끝난 주간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빠지고 비올라를 연주하는 친구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면서 연습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바이올린이 메인 멜로디를 담당하기에 내 실력을 뽐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화성이 아름다운 곡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허나 무언가 이상했다. 내 컨디션도 좋았고 아이들이 많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각 악기 별로 상당수의 아이들이 참석했음에도 무언가 내 귀에 익숙했던 아름다운 화성이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내 눈에는 비어있는 비올라 세 좌석이 들어왔다. 그런 것이었다. 비올라는 혼자서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아름다운 선율과 울림을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비올라가 없으면 전체적인 화성이 허술해져 음악 전체의 맛이 살지 않는다. 혼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악기이지만 전체 합주를 그 어떤 악기보다도 지탱해주고 부각시켜주는 악기였던 것이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문법요소 중 조사라는 것이 있다. 조사는 형식 형태소로서 홀로 쓰였을 때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글자에 불과할 뿐이다. 허나 그것이 다른 실질형태소와 결합하는 순간 실질형태소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었던 구체적인 의미들이 구현될 뿐만 아니라 그 실질형태소와 다른 실질형태소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나는 철없게도 내가 튀어 보이려는 삶만 살았다. 게다가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허나 이제는 나도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
다훈이 -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미소를 띄며 생활하는 하나고 내에서도 모범생 중의 모범생. 따라서 하나고 내의 아웃사이더의 휴식처의 역할을 하고 있던 나와의 접점은 고등학생 시절 내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 전부 잘나갔었던 흔적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고등학교이니만큼, 학교 내에서 리더가 되려는 아이들은 넘쳐났다. 특이하게 다훈이는 한발 물러서서, 미소와 함께 성실하게 잘 따르는 팔로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이러한 고민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멋진 녀석. 내 기억이 맞다면, 의치한 계열로 진학했다.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