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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인아 Dec 23. 2021

질문을 던지는 디자인

팀 총명기(2020) ⟪여명기―여성서사단편만화집⟫, 위즈덤 하우스

어린 시절 겨울이 되면 내 옆엔 귤 한 상자와 만화책이 내 키만큼 쌓여있었다. 올겨울엔 그 대신에 모니터 앞에서 인류학자 우즈마 리즈비(Uzma Rizvi)의 강연을 듣고 ‘변혁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라는 개념을 접했다.(이를 계기로 올해 우즈마 리즈비를 초청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리즈비와 변혁적 정의가 궁금하다면 이 페이지를 참고하시길) ‘어린애처럼 만화책이나 보냐’고 나무라던 아버지는 이제 내가 자랑스러울까. 하지만 나에게 모든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다. 리즈비의 강연은 만화책 덕에 각별했다.


⟪여명기⟫는 오랜만에 내 손에 들어온 만화책이다. 5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두 손 위로 묵직하게 그 존재감을 전달하며 책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했다. 표지를 구성하는 프레임은 여성이 주인공인 12가지 세상으로의 통로다. 다시 말해, 여성만화를 프레이밍 하던 ‘순정만화’의 질서가 힘을 잃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다. 이 세상의 틈을 연 12명의 작가는 독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며 프로젝트를 마무리한다. 강렬하면서도 따뜻한 주황은 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포착한다. ‘변혁적 정의'는 ‘기존의 질서가 힘을 잃는 새로운 개념의 세상’의 단서를 제공한다. 단어는 낯설었지만, 그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낯설지 않았다.

 

책《여명기》의 표지 그림


뒤늦게 이 책을 접하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더는 만화책을 보지 않았을까? 리즈비는 물었다. 디자인의 개념은 누가 정립했으며 거기서 배제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끝엔 디자인에 스며든 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논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새삼 다양한 요소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들의 사인으로 구성한 면지, 대사의 성격에 따라 변주되는 말풍선 안의 타이포그래피, 레터링으로 표현되는 의성어와 그와 한 몸처럼 어우러지는 그림… ⟪여명기⟫가 물었다. 만화책 디자인에서 디자이너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타이포그래퍼로 혹은 브랜딩 전문가로 디자이너가 만화가와 협업하면 어떤 만화가 가능할까? 그 만화는 어떤 종이에 어떤 인쇄가 어울리며 어떻게 확장될까? 왜 그동안 만화책을 다룬 디자인 담론을 접하지 못했을까?


명쾌한 느낌표가 뜨는 디자인이 주는 쾌감이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을 끄는 건 질문을 던지는 디자인이다. 거기 기존의 질서가 힘을 잃는 ‘새로운 디자인’으로의 통로가 있다.


이 글은 격주간 출판전문지<기획회의 529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 기고한 글의 미교열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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