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난잡한(Messy) 디자인 역사
2021년 영화감독 라울 펙 Raoul Peck은 말했다.
"모든 역사적 서사는 침묵당한 이야기의 모음이다." - 다큐멘터리 시리즈 <야만의 역사Exterminate All the Brutes>
역사는 승자가 쓴다고 배웠다. 같은 문장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 역사는 억압자의 기록이다. 페미니스트의 눈을 갖게 되면 그동안 ‘침묵당한' 보물 같은 이야기를 건져 올려야 한다는 충동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침묵을,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디자인 사학자 마사 스코포드 Martha Scotford는 “난잡한 역사 대 깔끔한 역사: 그래픽 디자인의 여성에 대한 확장된 관점을 위하여 Messy History vs Neat History: Toward an expanded view on Women in Graphic Design"(1994)에서 이 불가능해 보이는 페미니스트 디자인 역사 쓰기의 틀을 제공한다.
마사에 따르면 깔끔한(Neat) 역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 서술 방식을 말한다. 이 역사는 연대기에 따라 축적되며 직선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시기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를 그의 작업에 집중하여 매끈하게 서술한다. 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삼고 있는 필립 B. 멕스 Philip B. Meggs 의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Meggs’ History of Graphic Design”(1983)는 깔끔한 역사 쓰기의 대표 사례다. 필립은 자신의 책에 가해지는 비판에 자신은 "시각 디자인이라는 학문에서의 의미론적(단어의 뜻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탐구하는 방식) 구문적(법칙이나 패턴 등을 탐구하는 방식) 변화를 파악하고 기록"하는데 의미를 둔다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이 책의 초판에서 고작 9명의 여성을 언급하고 여성 5명의 작업을 실었으며 2016년 증보판에 실린 594명의 디자이너 중 여성은 62명, 유색인종은 80명이다. 이러한 깔끔한 역사 쓰기는 결국 더 쉽게 찾을 수 있고, 더 많이 볼 수 있는 특권층(백인-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 디자이너의 목소리를 재생산하며, 객관적인 학문의 탈을 쓰고 소수의 이익에 활용된다.
마사는 침묵당한 이들을 포괄하는 난잡한(혹은 지저분한 Messy) 역사 쓰기를 제시한다. 이 방식은 디자인을 (개인의 선천적이고 뛰어난 재능이 아닌) 협업의 결과물로 바라본다. 이 역사에서는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그의 일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사회적의 구조적 맥락 역시 동등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여성의 사례에 집중하기 위해 마사의 글은 디자인에 있어 여성의 다양한 역할과 위치를 리스트업하고 이후의 더 넓은 가능성을 모색하며 마무리한다. 마사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독립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여성 디자이너, 인하우스/에이전시 소속 디자이너, (남성) 디자이너의 파트너, 디자인계를 떠난 여성 디자이너, 여성 디자이너끼리 협업하는 디자이너, (남성) 디자이너의 사업 운영을 돕는 여성 혹은 일을 도왔으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디자인 학계의 교육자 혹은 학생으로서의 여성, 디자인계 비평가, 역사가 혹은 이론가로서의 여성
정리하자면 마사의 글은 역사가 쓰이는 방식을 재정의하고, 아울러 디자인의 정의 역시 다시 쓰는 일 그 자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페미니스트 디자이너의 관점을 가진다는 건, 지금껏 배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처음부터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일이기도 하다.
1984년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작가 오드르 로드(Aurdre Lorde)는 말했다.
“산문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도 필요하지만, 종이와 타자기도 필요하고, 시간도 많아야 한다. 시각예술을 생산해 내는 대 필요한 현실적 조건들 또한 그것이 계급적으로 누구의 예술이고, 누가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인지를 결정짓는다.” - "나이, 인종, 계급, 성"(1984, 오드르 로드)
계급은 ‘좋은’ 취향과 ‘좋은’ 디자인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역사에 남는 것은 ‘승자' 그러니까 ‘좋은’ 혹은 ‘우월한' 이들의 것이라고 배워왔다. 오드르가 영국의 백인 페미니스트 작가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필요하다"는 구절을 위와 같이 다시 쓰며, 그를 둘러싼 계급적 환경을 상기시키듯 ‘좋은 것’의 많은 부분은 그 자신보다는 그를 공기처럼 둘러싼 특권과 무관하지 않다. 오드르의 글처럼 오늘의 나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져 온 집단은 미국 흑인 디자이너들이다. 2021년 2월 흑인 역사의 달을 기념 하며 문을 연 흑인 원주민 유색인종 디자인사 BIPOC Design History 웹사이트에는 리서치를 이어가고 있는 다양한 흑인, 라틴계 디자이너-연구자들의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 나는 다시 질문하고 다시 역사를 쓰는 과정들을 배운다.
"해방을 디자인하기 Designing Emancipation"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한 디자이너이자 연구자, 교육자인 피에르 보윈스 Pierre Bowins는 착취와 혐오의 역사 속에서 미국 흑인 디자이너의 뿌리를 추적한다. 그가 주목한 건 미국 안테벨룸(Antebellum: 미국 남북 전쟁 직전 시기) 시대의 노예 기능공(Slave Artisan) 그중에서도 조판공과 인쇄공으로 일한 이들이다. 이들은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과 협력하여 브로드사이드(Broadside: 낱장에 인쇄한 선전물)를 조판하고 '북극성 North Star'과 같은 신문의 제작을 도맡아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크고 굵은 글씨가 특징적인 이들의 브로드사이드는 안테벨룸 시대의 주요한 시각자료로도 그 의미가 깊다.
1837년 2월 27일 열렸던 노예제폐지주의자의 강연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격노하라 Outrage' 브로드사이드를 보자. 글줄 형식의 문장에서 ‘격노하라', ‘폐지주의자', ‘오늘 밤', ‘1837년 2월 27일' 그리고 ‘노조여 영원하라'라는 단어를 크고 굵은 레터링으로 눈에 띄게 배치하여 정보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동시에 이 강조된 레터링 사이에도 위계를 두어 문장을 읽는 흐름에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글을 이해하고 의도를 담아 조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던 노예 신분의 이들에게 필요한 글자가 새겨진 활판을 찾고 단어와 문장을 조합하고 문단을 조판, 인쇄하는 기술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더 큰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작가 윌리엄 웰스 브라운 William Wells Brown이다. 피에르는 그가 노예시절 "세인트 루이즈 타임스 St. Louis Times"지의 조판을 하며 글과 문해력을 습득한 경험이 그가 미국에서 흑인 최초로 소설을 출판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리라 추론한다. 이 뿌리는 어디까지 이어져있을까? 피에르의 강연은 1539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인쇄소에서 작업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무명의 ‘검둥이' 노예(unnamed Negro Slave)’를 찾는 것에서 마무리가 된다. 흑인 디자이너는 미국 디자인의 시작점부터 존재했다. 미국 디자인사는 노예제와 흑인 억압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830년대는 한국으로 따지면 조선시대고, 순조와 헌종의 시대이다. 까마득한 옛날 같은 이 시대의 노예제도가 오늘날의 디자인사와 무관하다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예제가 폐지되었어도 백인우월주의는 남아있었다. 백인들의 반발을 고려해 노예제 폐지가 ‘범죄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조항에 따라 노예제는 곧 감옥으로, 수감자의 노역으로 이름만 바꾼 채 빠르게 재편성되었고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미국 전체 인구 중 6.5%만이 흑인 남성이지만 전체 수감자의 40.5%가 흑인 남성이라는 통계가 있다. 아바 두버네이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국 수정헌법 제13조' 참조) 흑인들의 투쟁도 멈추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운동은 흑인 민권운동으로 그리고 최근의 ‘Black Lives Matter’와 경찰 폐지운동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흑표당 Black Panther Party(1966~1982)은 이러한 억압에 맞서 무장까지 불사하며 급진적으로 맞섰던 단체로, 미국 투쟁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중요한 구심점이다. 이곳의 ‘문화부 장관 ministry of culture’을 맡고 흑표신문 디자인에 참여했던 에머리 더글라스 Emory Douglas 가 디자인을 처음 접한 곳이 학교가 아니라 ‘보호처분(정확히는 California Youth Authority, 소년 범죄자들을 다루는 곳. 인터뷰에서는 ‘감옥 가기 직전'이라고 표현한다)’을 받는 곳이었다는 점은 노예제에 저항했던 노예 인쇄공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내려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오늘날 흑표당이 갖는 역사적 위상에 비해 당시 현실에서 흑표당은 자생적으로 조직된 풀뿌리 단체로 무엇보다도 자원이 부족했고 디자인이나 신문 제작을 위한 공간이나 설비를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초기 흑표신문은 회원들의 단칸방을 전전하며 ‘휴대가 가능한 제작 세팅(portable operations)’을 갖추고 그것이 무엇이든 손에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었다. 열악한 환경과 상관없이 이들의 메시지는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최대한 빨리 전달되어야 했다.(관련 내용) 이러한 제약 속에서 에머리는 먹과 강렬한 키 컬러를 활용해 시선을 잡아끄는 포토몽타주 기법과 선이 굵어 빠르게 그릴 수 있고, 실수가 잘 드러나지 않는 펜드로잉 일러스트 스타일을 개발하여 흑표 신문의 그래픽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나간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은 이미지 전체를 관통하는 단순하고 강렬한 세로선의 활용이었다. 다양한 굵기와 패턴, 색상으로 변주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세로선은 미국 국기와 감옥의 철창을 동시에 시각화하며 이들에게 가해진 억압을 시각화하고 흑인 관점에서 바라본 미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글자체를 선정하고 이를 주어진 판형 위에 배치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노예 인쇄공의 일은 오늘날 디자이너의 일과 다르지 않다. 에머리의 작업처럼 주어진 여건 내에서 최선의 그래픽을 도출하는 일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매우 주요한 역량이다. 이들의 작업은 해방의 언어를 시각화하고 제작한 훌륭한 선례이다. 이들의 작업물은 디자인이 아닌가? ‘좋은’ 디자인이 아닌가? 어째서 대학은 이들의 작업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것을 배우지 않을까? 이러한 선례가 디자인사에서, 또 교육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면, 그럴만한 ‘좋은' 디자인의 조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디자이너를 길러내고 있는가?
1851년 인권운동가 소저너 트루스 Sojourner Truth는 말했다.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Ain't I a Woman?"(1851, 소저너 트루스)
디자인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오랜 기간 나는 내가 디자이너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곤 했다. 그때 나는 디자이너로 불릴 자격 혹은 조건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령 내가 실력을 길러서 특출 난 디자인을 한다면, 많은 이들에게 디자이너로 알려지게 된다면, 더 많은 돈을 번다면, 디자인에 대해 잘 알게 되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면… 곱씹어보면 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불안했고 그걸 알기 위해서는 권력이 있는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구도 속에서 동료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민을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요즘은 그런 고민을 하는 후배들을 발견하면 ‘뭐 그런 걸 고민하냐’고 면박을 주지만, 소저너 트루스의 질문이 보여주듯 이는 억압받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시달리게 되는 축적된 배제의 경험에서 발현된 것임을 이해한다. 더 이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새로운 답을 찾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디자인 사학자 콜레트 게이터 Colette Gaiter는 "돌파하라:민권운동 시위의 타이포그래피 메시지 Strike Through: Typography messages of Protest for Civil Rights" 강연에서 배제당한 이들의 디자인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디자인사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함을 설명한다. 그는 흑인 ‘예술가’ 콜렉티브인 아프리코브라 afriCOBRA 의 작업에 주목한다. 아프리코브라의 작업자들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흑인들만의 시각 언어를 개발하여 흑인 민권운동에 연대하고 자부심을 고양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들의 작업은 역동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문자들이 특징적인데 어쩐 일인지 이는 타이포그래피나 디자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이들의 작업은 언제나 예술 작업 혹은 그림으로 소개되었다. 왜 였을까? 복제 재생산되지 않는 '작품'이어서라면, 페이트 링골드 Faith Ringgold의 ‘여성, 자유, 안젤라 Women, Free, Angela' 의 사례는 더욱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앙아프리카 쿠바족의 모티브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업은 문자로만 이뤄져 있으며 포스터로 제작되어 여성주의 콘퍼런스 등에서 배포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1950년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뉴욕에서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했던 디자이너 일레인 러스틱 코헨 Elaine Lustig Cohen의 이야기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가 디자인에서 방향을 틀어 예술가의 길을 모색했을 때 미술계는 그를 ‘디자이너일 뿐'이라며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일레인은 더욱더 디자인과는 거리를 두기로 한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의 공로를 치하한 건 2011년 AIGA(미국디자인협회)였다. 여기서 디자이너와 예술가를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아프리코브라의 작업이 그나마 디자인과 가까운 예술계에 걸쳐있다면 흑표당의 심벌인 흑표범 로고 이미지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는 건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이 로고는 때때로 에머리의 작업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그가 유일한 흑표당의 디자이너인 건 아니다. 흑표신문 역시 협업의 산물이다) 2018년 링컨 쿠싱 Lincoln Cushing 이 "디자인 옵저버 Design Observer"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 로고는 3명의 여성에 의해 디자인되고 다듬어졌다. 이들의 이름은 도로시 젤너 Dorothy Zellner, 루스 하워드 Ruth Howard, 리사 리온스 Lisa Lyons로 이 중 누구도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뼈대가 되는 첫 흑표범을 그린 도로시는 학생 시절 지인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렸으며 흑백 복사에 용이하도록 작업했을 뿐이라고 회상한다. 이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요청받았는데, 이때 루스가 러프 스케치를 제공했다. 도로시가 루스의 러프 스케치를 다듬어 완성한 두 번째 흑표범 이미지는 학생들과 민권운동가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되어 1967년엔 TV에 등장하기도 한다. 유명세에 힘입어 이 흑표범 이미지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재생산되는데 UC버클리 콘퍼런스를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에 리사가 다듬어 사용한 버전이 오늘날 흑표당의 심벌로 널리 알려진 버전과 매우 흡사하다.
더 유명한 ‘비디자이너’들도 많다. 미국의 사학자, 사회학자, 민권운동 활동가로 잘 알려진 W.E.B 듀보이스 W.E.B. Du Bois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남부 흑인의 삶을 알리기 위해 아름답고 강렬한 인포그래픽을 제작한다. 이 그래픽들은 2018년 책으로 엮이기도 했다. 이 섹션의 문을 열어준 소저너 트루스 역시 이미지의 힘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탁월한 아트디렉터이자 마케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포토카드를 판매하는 파격적인 홍보 전략으로 순회 연설 비용을 마련한 것으로 유명하며 당시 사진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고 판매한 인물이 없었기에 그의 초상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사진 속 소저너 트루스는 보는 이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지적이거나, 강인하거나, 당당하거나, 따뜻한 모습을 선보이며 흑인 여성에 대한 관념에 도전한다. 사진 아래 적혀있는 문구 "나는 나의 그림자를 판매해 물리적 기반을 마련한다 I sell my shadow to support substances"는 노예였던 그가 이전에는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팔려 다니는 신세였다면 현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그림자를 판매한다는 자유인으로서의 선언이기도 했다.
마사는 필립의 방법론에 의문을 제기하며 묻는다.
“역사에 포함되기 위해서 작품이 ‘역사 어딘가에서 연원 해야’ 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나 인물이 다뤄질 확률은 낮아진다. 게다가 경계선이 언제나 고정되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디자이너들은 종종 디자인 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고, 더 많은 이들이 디자인 대학을 졸업하는 것을 이유로 들며, '전문적인 디자인'에 대한 단가 하락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비디자이너'들의 디자인 활동은 언제든 있어왔으며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이미지를 생산하기도 했다. 한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인쇄공 노조가 무너진 이유는 사회의 여성 혐오 때문이었다. 노조는 여성을 조합원으로 인정하기 않았고, 기업은 ‘여성(저임금/비숙련 노동자)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기술을 앞세우며 인쇄 노조의 대안을 찾았다. 디자이너와 비디자이너를 가르는 경계는 무엇을 침묵시키고 있는가? 디자이너와 비디자이너 사이의 경계 긋기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 밖에서 역사를 써 내려가는 미국 흑인 디자이너의 사례를 살펴보는 일은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정의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무너뜨리는 과정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내가 접해온 주류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기에 흑인이 아닌 나 역시도 무척 고양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하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이야기는 자본과 권력을 가진 유명하고 거대한 기업을 위해 일한 디자이너(주로 백인 혹은 일본 남성인 이유는 왜일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들 아닐까? 거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백인 혹은 일본 남성의 이야기를 따라감으로써 우리는 누군가를 혹은 우리 자신을 침묵시키고 배제하는 깔끔한 역사를 따라가는 건 아닐까? (물론 요즘엔 해외에 소개되는 한국 디자이너도 많다. 그간 다양한 주체를 포괄하라고 연구하고 논의해 온 많은 사람들 덕분일 테지만, 그 소개 또한 어떤 역사의 질서를 따르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역사는 경쟁과 불안이라는 문화를 낳았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좋은’ 디자인, ‘성공한’ 디자이너의 모습에 시달리는 나와 동료들, 후배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기저에 있는 우리의 욕망을 직시하고 더 많은 난잡한 역사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곳에는 경쟁과 불안이 아닌 연대와 협력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이 있다.
다른 한 편, 한국 디자인의 난잡한 역사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이유도 알고 싶다. 거기서 또 다른 타래를 분명히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난잡한 역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는 관점을 얻은 것 같아 빨리 아카이브를 뒤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본 사례는 역시 미국이고, 한국에서는 더 많은 장치나 시간, 지식 그리고 자원… 아니면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들이 활용한 기초자료들은 많은 경우 공공 혹은 사립 아카이브를 통해 잘 보존되고 공유되고 있다. 이 글에 언급한 모든 자료는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하고, 대부분 무료이고, 유료라 할지라도 최대 3만 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면 무제한으로 접근 가능하다.
1920년대 한국 책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자료를 찾다가 좌절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학계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 넘어야 할 벽은 높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디지털 자료라도 열람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검색을 통해 파악한 내용과 실제 CD 속에 조악하게 스캔되어 보관된 버전은 내가 파악한 바와 무척 달랐다.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자료였다면 꽤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매우 허탈했다. 내가 실물로 보고 싶었던 바로 그 책을 실제로 보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 전시의 유리벽 너머였었다. 그제야 나는 이미지로만 확인해서 무엇인지 몰랐던 표지의 테이프 같은 것이 은박임을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아직도 내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ㅠㅠ …)
이 시집의 내지 첫 세 페이지에 점점 제목이 커지며 전개되는 게 멋지다는데...(관련 기사)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말줄임표로 문장을 마치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유명한 책 조차도 제대로 자료를 보기가 어렵다는 게 좀 이상한 일 같다... 한국에 살면서도 내가 한국의 자료보다 해외의 자료를 더 찾기 수월하게 느낀다는 점은 좀 아쉽다. 그래서 나는 자주 ‘내가 방법을 잘 모르는 거겠지'를 되뇐다. (아는 방법이 있으신 분은 info@sceneryoftoday.kr 로 연락주십시오.) 이건 희망을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기도 하고… 내가 전업 연구자도 아닌데 뭘 더 얼마나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물론 해외에 그런 자료가 많은 건 그들이 역사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투자해온 긴 시간과 연구의 결실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70년 전에 전쟁을 겪으면서 자료를 소실할 일도 없었겠지… 아 그러고 보니 걔네가 우리 땅에서 전쟁했었구나) 100년 된 건물도 아파트 지으려 때려 부수는 판국에 당장의 자본이 따르지 않는 이런 프로젝트가 한국에서… 가능… 할까……? 그리하여 이 글은 다음 질문 ‘가령, 한국에서? 가능할까?’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큼 적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전에 한국인으로서 한마디를 외치고 넘어가야겠다… 화이팅..!!
이미지 출처
그림 1 격노하라 브로드사이드
https://www.loc.gov/item/rbpe.11803000
그림 2 흑표신문 표지 디자인
https://www.marxists.org/history/usa/pubs/black-panther/index.htm
그림 3 페이스 링골드와 일레인 러스틱 코헨의 디자인 혹은 페인팅
https://www.faithringgold.com/portfolio/women-free-angela-1971/
https://elainelustigcohen.com/artwork/centered/
그림 4 W.E.B. 듀보이스의 인포그래픽
https://www.loc.gov/
그림 5 소저너 트루스의 초상과 포토카드
https://en.wikipedia.org/wiki/Carte_de_visit
https://www.si.edu/object/npg_NPG.2002.90
https://www.scenichudson.org/explore-the-valley/our-parks/sjttrail/
그림 6 김기림의 기상도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14000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