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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pr 02. 2024

태그호이어의 실종

일요일 오전이었다. 12시에 지인 아들의 결혼식이 있다던 남편이 오전 10시부터 말끔하게 차려입고 거실로 나왔다. 물론 네이비색 셔츠는 정성껏 세탁 후 내가 다림질을 해 둔 것이었고, 색상을 고려한 넥타이와 간절기 계절에 맞는 슈트는 미리 내가 골라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남편이 열 시가 안 되어 장착할 줄은 전혀 뜻밖이었다.


거실로 나오며 유리진열장 문을 열던 남편이 내게 물었다. "어, 시계 어디 갔어?" 마누라가 짧게 되물었다. "무슨 시계요?" 그러자 남편이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태그호이어."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던 마누라가 냉큼 뛰어와 진열장 안을 확인했다. 어, 시계가 없다~ 나는 재빠르게 큰아들 방에 있는 시계 케이스를 가져다가 남편 눈앞에서 열어보였다. 거기엔 여러 개의 시계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는데, 남편이 찾는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거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대충 눈치채고는, 제 방문을 먼저 열고 이렇게 외쳤다. "제 방엔 없어요~"


시계의 구매자이며 소유주였던 남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잃어버렸네~"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책임자라고 스스로 옥죄며 살아가는 마누라가 넌지시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해 본다. "얼마 전에 당신이 손목을 흔들며 차고 나갔잖아요." 태그호이어를 찰 때마다 남편은 손목을 몇 번 흔들어주곤 했는데, 그게 초침을 맞추고 난 뒤 시계가 잘 작동되라고 하는 습관적인 제스처 같았다. 남편은 기어이 빈 손목으로 집을 나섰다.


태그호이어는 몇 해 전 남편이 중고 거래를 통해 구매한 시계였다. 마누라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덜컥 거금을 송금하고 받은 중고 시계 때문에 우리 집은 또 한 번 발칵 뒤집어졌었다. 우리 집이 뒤집어진 건 아니고 내가 뒤집어졌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인터넷 구매를 해본 적이 없는 남편은 인터넷 거래마니아인 직원에게 부탁해서, 가족들 아무도 모르게 태그호이어를 '몰래' 샀다. 시장에 가서도 대파뿌리 개수에 예민한 마누라에게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알고 있던 남편의 심사숙고의 결정과 즉각적인 행동이었다.


남편의 겁 없는 구매에 놀라기는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태그호이어 같은 명품을 보증서 없이 중고로 구매하는 배짱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란 데 이견은 없었지만 아들들은 침묵했다. 직원을 통해 구매할 바에는 차라리 중고거래 우수자였던 큰아들에게 문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기도 했었다. 각자 자기 몸에 붙어있는 두뇌를 활용하는 방식은 저마다의 몫이며 권리라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당시 중고로 구매한 태그호이어의 진품 여부가 우리 가족 모두의 관심사였던 건 분명하다. 큰아들은 그걸 면밀하게 사진 찍어서 자칭 타칭 태그호이어 전문가라는 사람에게 분석을 의뢰하였고, 나는 태그호이어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 진위 확인 절차에 관해 문의까지 했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부분적으로 흐릿하지만, 한국 서비스센터에서도 정확하게 판별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진위 여부가 정말 궁금하다면 스위스 여행 갈 때 가지고 가서 확인해 보라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의 중심에 있던 그 시계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들들은 아빠의 시계 가운데 유독 그 시계는 탐내지 않았었다. 아들들이 범인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범인은 오직 한 사람, 남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모든 탓을 남편에게 돌리고 태그호이어를 잊기로 했다. 살다가 잃어버리는 것이 어디 시계뿐이랴~ 그렇게 대범하게 생각하고 살기로 하였다.


사실 태그호이어 실종을 알게 된 그날은, 열두 시 결혼식보다 두 시간이나 앞서 집을 나선 남편의 예측 가능한 행적이 더 얄밉기도 했었다. 남편의 고등학교 선배가 전략공천으로 경선도 치르지 않고 모 선거구에서 그 당의 단독 후보로 출마한 바람에, 남편은 벌써 두어 달째 선배의 선거사무실에 드나들고 있었다. 공식선거운동기간이 되자 남편의 행보는 국회의원 후보와 더불어 더욱 바빠졌다. 후보의 보좌관도 아니면서, 매일같이 선거사무실 혹은 동문회사무실로 왔다 갔다 하는 남편의 가랑이가 곧 찢어질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날도 결혼식장에 가기 전에 동문회사무실로 먼저 갔을 남편이었다. 그리고 결혼식장을 다녀오고 나서도 남편은 곧바로 집으로 오지 않고 또 동문회 사무실로 달려간 정황이 포착되었다. 차 안이나 다른 어딘가에서 태그호이어를 찾았다는 소식을 주지 않아서였던 건지, 아니면 너무 유난 맞게 선거 운동에 쫓아다니는 남편의 행보가 얄미웠던 건지 나는 공연히 심기가 뒤틀렸다.


정장 바짓가랑이가 찢어지게 집으로 달려온 남편은 시큰둥한 마누라의 태도에 불편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선거사무실로 나갔다. 주말이라 집에 와있던 큰아들이 제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작은 아들은 간단한 캠핑 장비를 챙겨서 황사가 있는 야외로 나갔다. 혼자 재밌게 쏘다니는 남편이 얄미운 마누라는 심술이나 부리며 집에서 뒹굴거리고, 그 집 아저씨는 어디 행사장에 간 국회의원 후보 뒤에서 해맑게 웃고 있을 것이다.


큰아들이 하룻밤 자고 떠난 방을 정리하러 들어갔다. 아까 오전에 거실로 끌려 나갔던 시계 케이스 아래에, 시계 케이스보다 사이즈가 더 큰 안경 케이스가 하나 눈에 띄었다. 그 상자 안의 분리된 칸들 속에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는 안경들 옆으로 시계 하나가 멀뚱하게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짝퉁인지도 모를 명품 시계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가 그걸 찾아서 기뻤던 봄날 오후, 우리는 각자 자신의 봄날을 살았다. 무심천에 아직은 드문드문 벚꽃이 피었던 이천이십사 년 봄날의 하루가 또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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