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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pr 16. 2024

사월의 기억

"카톡~" 알림음이 떴다. 도서관에서 내가 지금 대출 중인 책을 누군가 예약했다는 알림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아마도 그 예약자 역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준비 중인 사람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알림톡을 받고 내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책은 지금 내가 실습하고 있는 기관에서 과제로 지정한 책인 데다가, 그녀는 그 도서관 바로 앞의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합리적 추론?(아무 의미 없는 추론일 뿐이다.)

 

물론 그 책의 예약자는 그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알림 톡을 받는 순간, 뒤쫓아오는 사냥꾼에 놀라서 필사적으로 달리는 한 마리 사슴처럼 무엇이든 빨리 써야겠다는 의지가 내 안에서 불쑥 터져 나왔다는 거, 그게 핵심이다. 의지의 발현, 생명의 힘찬 아우성~ 부정적인 스트레스가 아니라 긍정적인 시그널로 나를 감싸는 어떤 의무감. 내 안에 있는 온통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당장 처리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것이 내겐 중요했다.

 

나는 지난주부터 집 근처에 있는 지역아동센터로 사회복지사 현장 실습을 나가고 있다. 코로나와 부모님의 수술 등으로 실습 일정을 미루고 있다가 올 해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각성 단계에 저절로 이르렀던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작동했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실습은 나가야겠는데 역시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부모님이었다. 일주일에 두 차례씩 방문하여 돌봐드리던 것을 실습 기간 중에는 부득이 한 번 정도로 줄여야 하고, 혹시라도 실습 기간 중에 노쇠한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지레 걱정되는 마음이 적잖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걱정과 근심을 어딘가에 잠시 내려놓고 실습 일정을 잡은 데는 나의 불안장애와 우울감이 크게 작용했다. 이대로 있다간 침통함과 우울감으로 몸체를 키운 내면의 대형 선박이 나를 어둡고 축축한 바닷속으로 통째로 침몰시킬 것만 같았다. 나는 살기 위해 "어떤 의무"에 나를 종속시켜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의무에 이끌려 나를 몰아가다 보면 잠시라도 슬픔과 연민 등의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감정들과 교류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것도 같다.

 

상실의 슬픔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아무리 뇌과학이 발달해도 단기간에 그들을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치료법은 사실 불가능하다. 약물로서 뇌분비물을 완화시키거나 진정시킴으로써 일시적으로 그들의 '사고'를 둔감해지도록 도울 수는 있겠으나, 마음에 가득 찬 슬픔과 고통을 다스리는 데에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경구마저 무색할 지경이다. 슬픔과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다른 감정들이 조금씩 덧입혀져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그런데 그 시간 속을 헤매다가 슬픔과 고통에 완전히 침몰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 헤매고 헤매다가 아마 나는 어느 지점에서 문득 간절하게 살고 싶어 졌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도 같아서 탈출을 결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두 명의 늙은 부모님과 두 명의 조현병 언니들의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는 사명감이 내겐 엄중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며칠 전 종방한 드라마 <원더풀 월드>에서는 가족을 사고로 잃은 사람들이 주인공과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고 다시 그들의 삶을 이어가는 '원더풀'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도덕심을 상실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권력을 쟁취하려는 타락한 대통령 후보를 끝내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메시지는 대한민국 사월의 정서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오늘은 사월 십육일,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서 세월호 이야기가 생겨난 지 십 년째 되는 날이다.


 "사회적 억압에 대해 좀 더 능동적으로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사회복지사, 제도와 환경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하는 사회복지사"의 이야기가 내가 읽어야 할 과제 <사회복지사의 희망이야기>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말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the dead land)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라고 엘리어트가 그의 시에서 었던 사월의 정서는 처절한 고뇌이면서 동시에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봄이 되면, 모든 생명은 버거운 삶의 세계로 또 한 번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 엘리어트에겐 잔혹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졌던가 보다. 


망각의 눈(forgetful snow)에 쌓인 겨울을 차라리 따뜻하고 평화로웠다고 말하는 엘리어트는,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다시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살아내야 하는 우리 삶의 고통의 무게를 한 편의 시 속에 처연하게 표현했다. 마치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다시 맞이해야 하는 사월의 비통정서와 흡사하다.

 

유가족들이 살아내야 하는 또 한 번의 봄이 내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우주에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에도 일정한 총량이 있으면 좋겠다. 그 모든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삶을 살아가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잔혹한 운명을 짊어진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오늘도 친구 아버님의 부고가 한 장 날아왔다. 그 이별은 대체로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우리가 맞이해야 할 이별들이 대체로 순조롭고 평화롭기를.. 나는 소원하며 사월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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