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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자 Mar 28. 2023

웃으면서 거절하기

문과생 생존기

결국 조선소로 돌아오라는 예전 직장상사의 제의를 거절했다.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 돌아가면 익숙한 곳에서 지난 경험과 지식을 살릴 수 있었다. 요즘에 매일 새로운 일을 하다보니 익숙함이 주는 관성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때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기계적으로 일했던 그때가 오히려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조선소는 지금의 나라는 사회인을 만들었다. 학창시절 나의 꿈은 등대지기였고 혼자 소설책과 만화책을 읽으면서 살고 싶었다. 문사철 문과생이라서 취업의 전망도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십수년 일하고 공부했다. 좋은 사람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그분들과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봉급도 괜찮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희생할 수 없었다. 별볼일 없는 커리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받았던 제의들도 모두 그렇게 거절했다. 현실적으로 당장 이사갈 수 없는 상황에서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면 아이들을 볼 시간이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기숙사 생활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데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면 아마도 제의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하는 새로운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호기심을 자극해서 만족한다. 봉급도 나쁘지 않고 사람들도 괜찮다. 준비해서 독립하면 여유롭게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지난 주말 저녁에 스타벅스 기프티콘과 함께 거절의 문자를 보냈다.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순리대로 하자고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답장을 받았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일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예전에는 이런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외뢰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나?"

익숙한 목소리의 안부 인사에 누구인지 아는 척 답변했다.

"네. 잘 지내시죠?"

그는 그동안의 일을 말했다. 그제서야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는 조선소에서 같이 일하다가 계열사로 가서 온갖 갑질과 짜증을 부렸던 사람이었다.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후속 프로젝트를 수주할 예정인데 하청업체에서 일할래? 믿을 사람이 필요하다."

가해자는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떠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 뒷돈을 빼돌리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받았던 제안 중에 제일 거지 같은 개소리였다. 화를 참고 웃으면서 거절했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다른 일을 하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유능한 분과 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나중에 한번 보자는 그의 마지막 답장이 하루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이상한 말을 무시하고 비교적 덜 힘들게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실용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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