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고요히 그 이름 불러봅니다. 참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다정하게 청하여 본 것이.
슬아, 너 참 예쁘다. 하나님도 그리 대답하시네요. 그 말 들으려고 이토록 더딘 길을 걷고 있나 봐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참 무서웠어요. 저는 태생부터 못된 아이거든요. 착한 딸인척 했지만 동생은 은근히 괴롭혔어요. 저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친구는 누르고 싶었고요.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 판단 잘하고, 남편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꼭 이겨야 해요. 그러면서 열등감은 또 얼마나 심한데요. 학벌, 외모, 출신까지 제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이런 제가 참 싫어서 들킬까 봐 꽁꽁 감췄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저희 할머니가 늘 하시던 기도가 있어요.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주님, 우리 슬이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그 기도가 든든하기보다 두려웠어요. 이렇게 형편없는 나를 다 아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게 오히려 불안했어요.
2020년, 교회를 옮길 때 사실은 교회를 버리는 마음이었어요. 머리의 말로 '괜찮아. 잘 한 선택이야.'라고 설득해도 가슴은 방망이질 쳤어요. 주의 종을 등지면 벌 받는다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으니, 얼마나 떨었겠어요. 숨고 싶은데 시편 139편에서 말하듯, 주님은 "나를 다 살피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시니, 출구조차 없었어요. 제 모든 것을 감시하는 당신이 갑갑했어요.
저와 불합 했고, 하나님과 언짢았어요. 제가 하나님께 서운한 게 많아요. 떠나는 건 약해지는 거예요. 몸 담은 공동체에서 저와 남편, 두 아이를 바라던 눈빛이 경이에서 경멸로 바뀔 때 당신은 무얼 하고 계셨나요? 목사를 미워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고 숨죽여 울 때 어디 계셨나요?
처절하게 '향심'을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 마지막 남은 기도였어요.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당신이 저를 정말 떠나실까 봐, 버림받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하루 20분씩을 앉아있었어요. 에너지 넘치는 제가 그 습관을 들이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어요. 토할 것 같은 때도 있었고 어지럽기도 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 분심은 온통 목사와 교회였죠. 억울했고 비참했고 사납고 질척했어요. 그런데 향심은 참 안전해요. 향심 중에 시편 35편이 떠오르면, 그의 자식들이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는, 폐허가 된 집에서 쫓겨나 밥을 빌어먹는 상상을 했어요. 그러다 다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갔죠. 일종의 의무감에서 시작한 기도였는데, 조금 지나니 꽤 할만하더라고요.
향심은 저를 기다려줬어요. 저를 가르치지 않고, 계몽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그냥 바라봐요. 저도 악한 상상을 하며, 저주를 퍼붓고 있는 제가 한심해요. 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데, 남편과 두 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조차 버거워요. 그런데 향심 이후로 제가 저를 덜 몰아세우게 되었어요.
향심은 저를 아껴줘요. 지난날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나'가 불쑥 손님처럼 찾아옵니다. 어떤 날은 아버지의 눈빛이 아프고, 어떤 날은 엄마의 말이 아프고, 어떤 날은 S대에 들어가지 못한 내가 아프고, 어떤 날은 시골 아줌마인 내가 아파요. 향심은 그런 '나들'을 환대하게 해요. 아팠던 마음 곁에 거룩한 단어를 놓으며 사과해요. 그러면 아팠던 '나'가 홀연히 사라져요. 가끔은 씻어낸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요.
아직도 교회와 목사가 완전히 좋지는 않아요. 그런데 탓하지는 않을래요. 그 탁한 그리움을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다면, 그건 향심 기도가 아니겠죠. 천천히 비우고 받아들이며 당신을 만나갈게요. 처음엔 말끔히 가시는 날이 올 거라는 기대도 했어요.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 상처조차 저이니까요. 당신은 그 상처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향심 안에서 제가 주인공인 삶의 소설이 조금씩 개정된다고 할까요. 그렇게 조금씩 옅어지고 맑아져 당신의 거룩함에 이르기를요.
하나님, 저 마흔도 안 되었는데 향심의 이런 비밀을 알았어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 살던 저였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말았어요. 도대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몰아치듯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건가요?
저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저를 한결같은 침묵으로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더 이상 그 죗값 혼자 짊어지고 스스로 치르지 않을게요. 죄에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갑니다. 십자가 지고 가셨듯, 제 죄를 짊어지고 가주세요. 무절제, 합리화, 두려움으로 똘똘 뭉친 저를, 저는 포기해도 당신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걸 압니다. 하나님을 피했던 건 저였어요. 이제 제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가던 야곱이 꿈을 꾸고 말했잖아요.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늘 계셨던 주님을 이제 알아볼게요. 힘들 때마다 기댈게요. 쓰러지고 싶으면 쓰러질게요. 따지고 싶으면 따질 거고, 반항하고 싶으면 반항도 할 거예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까닭에 저는 이제 그럴 수 있어요.
하나님, 하늘에 학생 과장처럼 앉아 쪼잔하게 제 죄목을 적던 그 작은 하나님께 손 내밉니다. 그 작은 하나님 덕분에 한눈팔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엄마처럼 포근하고, 해 질 녘 노을처럼 넉넉한 하나님을 다시 만납니다. 당신이 말하시네요. "슬아, 너 왜 이렇게 예쁘니?" 충만해진 제가 제 일상의 성소로 돌아가 두 아이와 남편에게 우주가 담긴 밥을 해줄게요. "너 참 예쁘다." 그 말도 전할게요.
금방 또 무너지겠죠. '피정 다녀온 지 하루 만에 이게 뭐냐?' 제가 저를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달빛처럼 가만히 오셔서 저를 비추는 당신을 알아볼게요. 창문을 열듯 제 마음을 열어 다만 또 향심 할게요. 저는 저의 길을 모르지만, 당신은 제 길을 아시니까요. 가장 상냥한 눈빛으로 제가 저를 바라볼게요. 덜 방황하고, 덜 의심하며, 영원히 믿어주시는 당신 곁에 설게요.
참, 다정한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