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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18. 2023

맞아야 안길 수 있는 품이었다

아버지가 신사처럼 때리니 나는 숙녀처럼 맞아야 했다

“정신 차리게 한번 맞아야겠네. 오래 참았지.” 아버지의 고성 끝에 나와 동생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맞을 이유는 있었다. 책상 정리를 안 하고, 학습지가 밀리고, 서로 싸우고, 부모에게 대들고, 물건을 망가뜨렸다. 아버지와 한집에서 산다는 건 날마다 과오를 저당 잡히는 일이었다. 작은 실수가 모이면 반드시 매질로 돌아왔다. 마지막 과실은 때마다 달랐고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어떤 사건이 도화선이 될지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한 달에 한두 번 문이 잠긴 방안으로 감금되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이 살았는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잠자코 들었다. 안방 옷장과 벽 틈 사이에는 회초리가 되길 기다리는 굵기와 색깔이 다른 아크릴 막대가 십수 개 있었다. 아버지는 그중 가장 적당한 를 골랐다. “오늘은 열 대씩 맞자.” 아버지의 말은 법이었고, 잘못을 저질렀으니 대가를 치뤄야 했다. 안방에 갇힌 것도, 매를 맞는 것도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피하면 처음부터 다시 맞고, 열 대씩 늘어난다.” 견디지 못해 백 대를 맞더라도 인내심 없는 우리 잘못이었다.  

   

아버지는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온몸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부모도 있는데 회초리로 손바닥만 때리는 자신이 얼마나 신사적인지 강조했다. 아버지가 신사처럼 때리니 나는 숙녀처럼 맞아야 했다. ‘이 손은 내 손이 아니다. 나는 고통모른다. 이건 아픈 게 아니다.’ 그 순간 손이 없다고 여기며 이를 악물었다. 열 대를 연이어 맞고 나면 손바닥이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지손가락 아래 손바닥이 푸릇하게 부풀어 올랐다.      


문제는 동생이었다. 동생은 두세 대 맞고 손을 움츠렸고 그러면 처음부터 스무 대를 맞아야 했다. 그다음에는 서너 대 맞고 피했고 회초리 수는 또 늘어나 서른 대가 되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나보다 훨씬 많이 맞았는데 동생이 맞아야 하는 회초리 수는 일흔 대쯤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그러진 눈, 부들부들 떨리는 턱, 아버지를 향한 괴성, 동생은 작은 요괴 같았다. 마법에 걸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몽둥이를 피해 도망치는 것뿐인 힘없는 요괴…. 아무리 달아난들 방안이었으니, 승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것이었다.      


“혜린 아빠, 문 열어요.”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며 애걸복걸할수록 아버지는 이성을 잃은 야수처럼 더 거칠어졌다. “그만해라. 내가 죽어야지. 내가 오래 살아서 별꼴을 다 본다.” 애타는 할머니 목소리마저 사그라지면 세상이 우리를 버린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그 방에서 나가는 것도, 반쯤 미쳐버린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도 나 혼자의 몫이었다. “잘못한 거 말해 봐.” 그 방을 나갈 수 있다면 없는 죄도 만들 수 있었다. 엇나간 말의 결과는 몽둥이질 뿐이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바른말들을 꾸역꾸역 눌렀다. 있는 죄 없는 죄를 갖다 붙여 “잘못했어요.”라며 엉엉 울면 아버지 얼굴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뉘우쳤다기보다 무서웠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알았을까.     


동생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쯤 되면 신사적인 체벌은 온데간데없고 때리는 야수와 포효하는 요괴만 남았다. 중학생이 된 동생이 말해서는 안 되는 아버지의 치부를 건드릴 때면, 시뻘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내 것일 수 있었던 매질이었다. 온몸이 멍들어가는 동생을 보면서, 거기 내가 있지 않음에 안심했다. 손바닥을 버티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동생이 가여웠다. 자라면서 그 가여움이 한심함으로 번졌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면 숙녀처럼 맞고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텐데….     


폭풍이 지나간 후 의식의 빛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우리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어떤 회개와 후회가 담긴 고해성사 끝에 어떤 변명과 희망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아멘’ 끝에 우리를 안아주었다. 체벌 같은 포옹이었다. 아니, 체벌보다 더 끔찍한 아량이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감사해야 할지 순간 아득해졌다. 안겨본 적도 안아준 적도 없는 삶이었다. 맞아야 안길 수 있는 품, 전혀 고맙지 않은 품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뒤늦게 슬펐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고, 사과는 잔인했다.


Photo by Oxana Mel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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