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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9. 2024

네가 가져간 나의 봄

엄마 옆에 장녀의 자리는 없다

병인년 수릿날, 나는 언니가 되었다. 내가 태어난 것도 내 뜻은 아니었고, 열여섯 달 만에 장녀가 된 것도 그러했다. 혜린과 예린, 한 글자만 다른 나와 동생의 이름도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다행히 나에 대한 모든 사랑이 저물지는 않았다. 탄생과 동시에 동생은 아들이기를 바랐던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나를 향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첫정은 더 깊어졌다. 다만 엄마에게 내 몫의 사랑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돌도 되지 않았을 때, 뱃속의 동생 때문에 더 이상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았을 무렵부터 엄마의 가슴뿐 아니라 그것의 온기까지 내어주어야 함을 직감했다.


동생과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마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어색하게 동생을 안아주었을 것이다.

“동생이야. 네가 언니니까 잘 돌봐줘.”

엄마의 말에 책임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봄날을 앗아간 괴물 같은 아기를 내쫓고 싶은데, 그것은 엄마를 거스르는 일이라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동생에게 딸랑이를 흔들어주고 엄마에게 기저귀를 가져다준 것은 동생이 아니라 엄마를 위해서였다. 동생의 적대자가 되어서는 사랑받을 수 없으니 엄마의 협력자가 되는 편을 택했다.

“혜린이 잘한다.”

그 말은 엄마의 유일한 사랑 표현이어서 나는 점점 칭찬에 목마른 아이로 커갔다. 동생은 자랄수록 머리숱은 많고, 눈은 크고, 얼굴은 뽀얘져서 나와 달리 어딜 가나 예쁘다는 말을 들었고, 나는 그런 동생 옆에서 더 기특한 맏이가 되려고 애썼다.


언제나 동생은 나보다 어렸고, 엄마의 손길이 더 필요했다. 나는 유치원 입학 전까지 엄마보다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할머니와 고모 집에 가고, 밤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서 잤다. 우리집이 있는 원종동에서 고모집이 있는 원미동까지 버스로 20분 정도 걸렸는데 할머니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수를 향해 말을 건네는 놀이를 즐겼다.

“나무야, 잘 잤니?”

할머니는 나에게도 나무와 인사를 나누라고 했는데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이 태어난 뒤로, 갑자기 다 커버려서 아이의 세계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고모 집에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잘 다녀왔어? 재밌었어?”

집으로 돌아가니 엄마가 물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할머니는 나를 살뜰히 보살펴 주었지만 나는 엄마가 보고 싶은 세 살 아이일 뿐이었다.


할머니가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혜린이가 우리집 기둥이야. 오빠가 없으니까 네가 장손이야. 첫째가 잘해야 해.”

남매가 되지 못한 자매는 운명처럼 둘 중 하나가 아들이 돼야 한다. 동생은 장손의 일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장녀로서 장남의 역할까지 떠안았다. 집안 분위기가 냉랭해지면 가족들의 감정을 살피는 한편,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서적 부양은 맏딸의 몫이고, 경제적 부양은 맏아들의 몫이기에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착한 모범생을 자처했으니 아들 부럽지 않은 딸로 자라기만 하면 되었다.


여자라서 당한 차별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가부장 문화는 결국 내 것이 되어, (이슬아 작가의 표현을 빌려) 가녀장 시대를 살았다.

“넌 항상 잘했어. 너 때문에 마음 졸일 일이 없었어.”

엄마의 칭찬에 잠시 우쭐했지만 나를 의지하는, 내가 지켜야 하는 이들은 갈수록 무거웠다.

“혜린이 너만 알고 있어. 딸이니까 이런 말하지.”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중재자 임무를 해내느라 아이로서 몰라도 되는 어른들의 사정을 일찍 알았다.

“혜린이는 내 편이지.”

할머니의 사랑은 숨이 막혔다.

“너희 엄마는 팬티가 해져도 살 줄 모르지. 나 없으면 이 집안 살림을 다 누가 해.”

할머니의 황송한 사랑은 황량했다. 할머니가 엄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마를 해하는 그 말들은 나에게도 생채기를 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를 끔찍이 아끼는 할머니를 싫어하는 나를 자책할 뿐이었다.


동생은 할머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할머니가 동생을 ‘못된 년’이라 부르며 호되게 몰아붙일 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가 동생을 ‘지밖에 모르는 년’이라며 거세게 내몰 때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동생에게 오래전 나의 봄을 빼앗겼으니까….

다섯 살의 어느 날, 엄마와 아버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거칠게 싸웠고 나와 동생은 울었다.

“엄마랑 아빠랑 이제 따로 살 거야. 누구랑 살지 골라.”

아버지의 질문에 동생은 엄마를 먼저 골랐고 나는 장녀로서 아버지와 할머니를 택했다. 병인년 수릿날부터 엄마를 동생에게 수없이 내줬는데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혼은 없던 일이 되었지만 나는 그 후로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엄마를 보내는 연습을 했다.

내가 열아홉이 되었을 때, 동생은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아버지와 갈등이 극에 달했다.

“집을 팔아서 엄마는 예린이랑 살고, 너는 아빠랑 할머니랑 따로 살아야 할 것 같아.”

그 말은 보통 엄마가 재수하는 딸을 찾아와서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할 말은 아니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김밥 꽁다리와 떡볶이의 어묵까지 남김없이 다 먹고 학원으로 올라가 공부를 했다. 다섯 살의 그날부터 수없이 그려온 그림에 그제야 도착한 기분이었다. 봄을 빼앗긴 언니는 한 번도 봄을 누려보지 못한 동생에게 봄을 양보해야 했다.


Photo by Roberto Nick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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