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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14. 2023

질문만 알고 답을 모른다는 것

〈교회 가기 싫은 날〉7.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질문만 알고, 답을 모른다는 것을.

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밖에는.

그러나 그분은 절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 진 에드워드, 《세 왕 이야기》, (예수전도단, 2007), 47쪽.


내가 처음 교회 갔던 날, 예배당 앞에 유모차가 있었다.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 S의 것이었다. “너 안고 숨이 차서 언덕을 오르면, 본당 앞에 늘 유모차가 있었어.” 엄마는 손녀의 유모차 앞에서 옛 일을 떠올렸다. 자전거도 귀하던 시절 나는 보행기도 겨우 탔다. 나와 S는 그렇게 닮은 듯 달랐다. 우리가 알기 전부터 모태신앙의 길에 들어선 것은 비슷했다. S는 어렸을 때부터 첼로를 배웠고 매년 성탄 전야제 때 축하곡을 연주했다. 큰 악기의 중후한 울림은 부드럽고 부러웠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수십 명의 아이들이 교회에 왔다가 사라졌다. 소풍, 여름 성경 학교, 친구 초청 잔치 같은 행사 때면 교육관이 비좁을 만큼 아이들로 꽉 찼다. 중고등부, 청년부를 거치면서 많은 아이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나와 S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권사, 장로의 딸인 우리가 주일마다 성가대를 서는 것은 학교에 가듯 당연한 일이었다. 잠도 다 깨지 않은 채로 찬양을 부르다 삑사리를 내면 S는 슬쩍 모른 척 해주곤 했다. 분반 공부 끝나고 떡볶이를 먹고, 수련회 가서 밤새 게임을 하고, 그 나이의 고민을 나누며 나와 S는 잘 자랐다. S가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25년을 매주 만났다.


그 후로는 S의 아버지를 더 자주 보았다. S의 아버지인 J 장로가 교육부장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는 내 삶의 한 축이었는데 주로 가르치는 일을 했다. 푸른 봄날, 학업, 과외, 연애로 바빠도 주일은 언제나 유치부, 중고등부, 청년부를 지켰다. 자연스레 J 장로와 많이 마주쳤다. 답사, 회의, 평가회 등 밥 얻어먹을 이유는 많았다. 수련회를 가면, J 장로는 교회 마당에 텐트를 치고 들어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밤새 나오지 않았다. 강화 성지 순례를 앞두고 어렵게 구한 책이라며 이덕주의 《눈물의 섬 강화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서도 중앙교회에서 온수리 성당까지 발걸음 세긴 책은 지금도 책꽂이에 있다. 


결혼 후 나는 남편 교회로 옮겼고 모교회는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몇 달에 한 번씩 가면 식당이 사라지고 본당 입구가 헐려 있었다. 건축은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목사와 장로 저마다 원하는 건축의 방향이 달랐고 설계, 허가와 관련해 잡음이 생겼다. 편이 둘로 나뉘자 판단의 문제는 마음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누구도 이기지 않은 싸움, 멀리서 그 아픔을 짐작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아버지는 교회에 남고, J 장로는 떠났다. 말의 칼날은 돌이키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그 후로 나는 S와 J 장로 모두 만나지 못했다. 어쩐지 서먹해지고 말았다. S와 J 장로뿐 아니라 함께 교회를 떠난 이들도 볼 수 없다. 그곳은 더 이상 내 유년의 교회가 아니다. 전쟁 같은 시간 모두 내가 겪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내가 다니는 교회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목사의 말과 행동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늘어 갔다. 목사는 설교 중에 한 인물을 심하게 미화하거나 비난했다. 유튜브 영상은 특히 거북했다. 설교의 청자는 보통 대형 보수 교회의 권력자였다. 나도 교회 부자 세습은 반대하지만 매주 같은 소리를 들자니 겨울밤처럼 지루했다. 목사에게 우리 삶을 봐달라고 목사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그가 답했다. “앞으로는 그런 의견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주세요. 제직회 때 이야기해도 좋고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싸움은 시작된 이상 어느 쪽으로든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 판단하고 따지고 추궁하며 피차 형편없어질 뿐. 


목사는 모든 것을 선과 악, 강자와 약자, 옳고 그름으로 나누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헤맸다. 그리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한없이 강하다가도 더없이 약한 ‘나’. 나는 늘 평온한 일상을 꿈꿨다. 하지만 두 아이는 울고, 떼쓰며 자주 내 삶의 고요를 깨뜨렸다. 두 악마를 어쩌지 못해 씩씩거리면 또 기막히게 아름다운 순간이 찾아왔다.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두 아이는 “발 내밀지 마”, “내 자리야”라며 소리쳐 싸웠다. 짜증을 누르며 짐을 옮기는데 여섯 살 둘째가 돕겠단다. 달걀을 든 아이의 한 걸음이 하루 같았다. 행여 놓칠까 걸음마다 온몸이 들썩였다. 천사였다. 우리 모두 선과 악 그 사이 어디쯤 있지 않을까. 이분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목사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제단해 어떤 여백도 없는 삶, 그의 인생은 어딘가 불편하고 따분해 보였다. 


고단한 인생으로 얼룩진 마음일 때, 찾아갈 수 있는 목사를 바랐다. “괜찮아요. 잘하고 있어요.” 위로받고 싶었다. 그 흔한 말이 내 생에는 참 드물어서 스스로 해보아도 자주 외로웠다. 내가 원한 것은 품어 주는 하나님, 그 같은 목사였다. 목사에게 신을 바란 오류일까. 스무 명 남짓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목사를 인정하는 이도 있었다. 나와 남편이 짐을 꾸리자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 신앙은 어떡하려고….”, “올해까지는 있어야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서로를 설득할수록 오해만 깊어졌다. ‘분열’이라는 말은 견디기 힘들었다. 살뜰히 챙기고 아끼던 이들이었다. 각자의 근심이 질책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난날은 지켜야 했다. 성탄절 마니또에게 받은 선물과 편지는 고마웠고 이따금 달고 짠 과자를 먹으며 나누던 이야기는 흐뭇했다. 누군가의 취업, 결혼, 출산 소식에 코끝이 찡해져 어쩔 줄 모르던 마음도 그대로였다. “축하해.”, “응원 할게.” 힘주어 손잡고 꼭 안던 순간 모두 진심이었다. ‘S와 J 장로처럼 어색해지면 어쩌지. 더 가면 영영 잃을 거야.’ 추억이 추억일 수 있도록, 서로를 놓아야 했다. 나와 목사는 평행선이지만 접점이 있는 이도 있다. 떠나든 남든 각자의 몫이다. 실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더 많은 우리였다. 교전은 목사 하나로 충분했다. 싸워야 한다면, 최대한 작아야 한다. 


목사가 등 돌리자 세상이 나를 버린 듯 막막했다. 떠나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다. 나의 실패와 한계를 본다. 질문만 알고 답은 모르는 이 시간을 그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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