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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15. 2023

슬픔은 게으르다

〈교회 가기 싫은 날〉8.

여름이어도 해는 더뎠다. 까만 밤, 두 눈을 뜨고 해가 퍼지기만을 기다렸다. 건너편 보개산부터 햇빛이 차오르자, 노(老) 권사는 작정한 듯 교회로 향했다. 일흔네 살 동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동생이 네 살 되던 해, 전쟁이 일어났고 부모를 잃었다. 당시 열여섯이었던 노 권사는 별안간 엄마가 되었다. 아들처럼 키운 동생이었다. 평생 한동네에서 며칠 전까지 위아래 집에 붙어살았다. “누님”하며 문 열고 들어오던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노 권사는 동생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을 앓다가 처음 나선 길이었다. 


동생은 몇 해 전 은퇴하기 전까지 안수집사로 교회를 지켰다. 봄이면 풀을 뽑고, 겨울이면 장작을 지피고, 수요일이면 교회 차를 운전했다. 가까운 이부터 하나둘 목사에게서 등을 돌려도 마지막까지 곁에 남았다. 교회 카페(홈페이지)에서 댓글을 주고받는 공동체 설교에 끝까지 참여했다. 


건지천 따라 뻗은 도로를 타고 장수동을 지나니 산 아래 교회가 보였다. 코로나 이후 한 계절이 지나도록 가지 않은 예배당, 마당은 온통 풀과 똥이었다. 교회에 들어서자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가장 길었던 장마, 온갖 것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눅진했다. 


목사와 마주 앉은 노 권사의 소리가 로비를 매웠다. “故 이 장로가 이 교회를 세운 이유는 전쟁 끝나고 사람들 마음이 너무 팍팍해서 싸우기만 하는 터라 사랑이 필요해서였어요.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 중에 교회 안 오는 사람이 더 적을 만큼 사람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에 누가 있습니까? 동네 사람들한테 교회 가자고 하면 목사란 사람이 그렇게 싸우는데 싸우기 싫어서 교회를 안 간대요. 이곳이 교회입니까?” 60년 전, 노 권사의 집에서 시작한 교회였다. 서울에서 온 전도사를 먹이고 재우며 교회 터를 닦기 시작했다. 어린 사 남매는 잡곡밥을 먹여도 목사에겐 쌀밥을 대접했다. 노 권사가 말을 이었다. “이 교회에서 그만 나가세요.” 그 말을 하려고, 밤새 해 뜨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열 시쯤, 전화벨이 울리자 목사는 나갈 채비를 했다. 교회에서 나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 묻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장례식에 다녀오겠다고, 돌아와서 이야기하겠다며 급히 사라졌다. 여든여섯의 노 권사는 홀로 남았다. 태풍이 잿빛 하늘을 몰고 와서, 할퀸 듯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졌다. 시간은 무심히 지나갔다. 사모는 나갔다가 돌아와 2층으로 올라갔고 내다보지 않았다. 지난 10년, 밖에서 요란스레 풀을 깎고, 눈을 치우고, 물건을 옮기고, 공사를 해도 꼼짝하지 않는 목사와 사모였다. 


오후 4시, 서산 아래 교회는 어둑했다. 노 권사는 아침에 일어나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가족 모두 말렸지만 답을 듣기 전에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사모에게 전화를 해서 목사의 행방을 물었다. “목사님 멀리 갔대요. 오늘은 안 온다고 했어요.” 목사에게 전화를 했다. 저 멀리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배경음이라 하기에 너무 선명한 물결의 울림이었다. 노 권사의 손녀가 물었다. “할머니가 집에 안 가시겠대요. 떠날 건지 남을 건지만 답해주세요.” 목사는 답을 피한 채 “돌아가면 찾아뵐게요.”라며 서둘러 끊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감돌았다. 노 권사는 사모를 불렀다. 비슷한 이야기 끝에, 사모는 잘 몰랐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사모의 방식은 결론적으로 목사와 같았다. 노 권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교회에서 떠나세요.” 사모는 교인 수 2/3 반대라는 법을 내밀었다. 


교회를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사모는 나의 눈을 피했다. 만나자고 하니 시간이 없다고 했고, 차일피일 미룬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보았어도 사모는 몰랐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사모는 늘 예배 10분 전에 황급히 사택에서 내려왔다. 처음엔 무던하다 여겼는데 어느 순간 무심함으로 보였다. 


노 권사의 동생(Y 집사)이 스스로 삶을 매듭지은 후, 슬픔이 몇 번씩 나를 덮쳤다. 너무 무겁고 가까운 죽음이었다. 데리다가 말했다.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다.” Y 집사 예전의 말, 웃음, 몸짓, 그 평범한 시간들 모두 묻어야 했다. 남편이 교회 소식지를 만들 때, Y 집사는 성실한 필진이었다. 그의 글은 예리하면서도 온화했다. Y 집사를 처음 만난 날, “소식지 통해 집사님 글 많이 읽었어요.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더니 그가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내가 유아실에서 두 아이와 예배를 드릴 때, Y 집사는 손녀와 함께 들어왔다. 서로가 있음이 든든했다. 


목사에게 남은 이들과 목사에게서 돌아선 이들의 갈등이 점점 뚜렷해졌다. 재직회 날, “왜 그런 겁니까?”, “설명을 해보세요.” 날 선 말들이 오갔고, 공기는 갈수록 차가워졌다. 뒤에서 마음 졸였지만 다행히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끝나고 짐을 정리하는데 목사가 Y 집사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서로 환히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목사는 나를 휙 지나쳤다. 눈빛은 서늘하고 입가는 매정했다. 문득 ‘나는 없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순간 Y 집사와 멋쩍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리 사이의 목사라는 간극만 점점 커졌다. 


내가 쓴 책이 나왔을 때, Y 집사가 관심을 보였다. “책 제목이 좋아. 따뜻한 글일 것 같아.” 마음 써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예전이라면 어려움 없이 한 권 건넸겠지만 상하고 찢긴 마음 사이에서 오해할까 겁났다. 한참을 망설이다 Y 집사 집으로 찾아갔다. 봄이 되려는 겨울의 한낮, Y 집사는 뜻밖의 방문에 해사하게 웃었다. 몇 주 지나, Y 집사가 편지 봉투를 건넸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집사님 같은 분이 책을 내셔야 하는데, 부끄럽습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봉투 안에 짧은 서평과 10만 원이 들어있었다. 마지막 문장이 가슴이 박혔다. ‘책 선물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주옥같은 글들 많이 펴내시기를 응원합니다. 약소해서 미안해요.’ 고마움과 송구함이 뒤섞였다. ‘돌려드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답장을 쓰자.’ 코로나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이른 죽음을 마주하고 말았다. 


목사는 다음 날인 주일 오후에 돌아왔지만, 노 권사에게 연락이 없었다. 코로나 덕분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목사는 그 후로 노 권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렵게 통화가 되었을 때, 목사가 말했다. “제가 무얼 잘못했나요?” 이 글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노 권사는 남편의 외숙모이다. 시어머니는 장례 이후로 노 권사의 곁을 지켰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가슴에 돌덩이가 떨어진 듯했다. 도저히 음식을 넘길 수 없어, 겨우 맨밥을 먹었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슬픔은 게으르다. 아무리 떠밀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없어진 듯 잠자코 있다가 다시 느릿느릿 나를 삼켰다. 쓰지 말자고, 쓸 수 없다고, 쓰면 안 된다고 다그칠수록 자꾸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글이 되지 못한 문장들이 멋대로 내 안에 고였다. 모르고 싶었는데, 거듭 알아졌다. 나는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 권사는 장례식을 간다던 목사를 종일 기다렸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오후가 되니 해가 떴다. 먹먹함과 막막함으로 바라보던 텅 빈 하늘에 동생을 그리다가 자신마저 가고 싶게 될까 봐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 부쩍 수척해진 그녀였다. 그날 오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노 권사를 설득하기 위해 교회에 갔다. “그만 집에 가요.” 말하면서도 그 숨결 곁에 그저 앉았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한 주 사이에 서먹해진 세상을 무념이 바라보는 일, 여전히 바람이 불고, 달이 떴다. 문득 노 권사마저 잃을까 무서웠다. 


목사는 스스로 무해(無害)한 사람이다. 목사는 억울한 듯 말했다. “여자, 재정 문제없이 이렇게 깨끗한데 뭘 잘못했다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여자 문제도 없었고, 어떤 일도 하지 않으니 재정 문제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교인들은 곪았다. 목사가 설교 외에 열을 올렸던 것은 하나, 교회 카페에 글을 나르고, 영상을 올리고, 댓글을 쓰는 일이었다. 일흔, 여든 넘은 어른이 들어가기에 그곳은 너무 좁고 답답했다. 대부분 무관심했지만, 유일하게 남은 이가 Y 집사였다. 어쩌면 목사와 가장 가까웠던 이였다. 그런데 그는 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생을 마쳤을까. 삶이 배제된 가상공간이 무슨 의미일까. 가끔 목사가 아담 같았다. 90년대 말, ‘세상엔 없는 사랑’을 부르며 등장한 사이버 가수 아담. 목사는 지금도 출판을 위해 원고를 쓰고, 동기 목사 카톡방에서 열띤 신앙 토론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쉽게 살아보려 해도 삶은 언제나 어려운 숙제이다. 아직도 인생이 불편하기만 한 건 왜일까. “네, 알겠습니다.” 웃으며 끄덕이지만 사실 한 겹만 벗겨도 한참 모자라다. 인정받고 싶은 ‘나’, 화나는 ‘나’, 걱정하는 ‘나’가 서로 질세라 고개를 들이민다. 힘써 다독이고, 세차게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하라고 밀어낼수록 그림자는 더 유치하고 거센 방법으로 꿈틀댔다. 이제 내 안에 깃든 미움, 거짓, 두려움을 그저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겨울 같은 마음을 걸을 때면, 그냥 추위를 견디는 수밖에 없다. 사계절 모두 내 것이었다. 


사람은 그렇듯 누구나 빛과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목사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별 고민 없이 “저에겐 완악함이 없어요.”라고 말하던 그였다. 목사는 자신을 신으로 오해했다. 나 또한 그를 신으로 여겼다. 혼내고, 벌하는 하나님 곁에 꾸짖고 정죄하는 목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 목사에게 아무도 자신의 그림자를 내보일 수 없었다. 행여나 모자람을 들키면 꾸지람과 핀잔이 돌아왔다. Y 집사도 그림자를 애써 지우고 버리다 결국 죽음에 이르렀던 것일까. 


고남산 앞으로 집 몇 채가 보인다. 동생이 “누님, 온종일 어딜 다녀와요?” 물을 것만 같다. 서산마루에 걸린 해가 노 권사의 집을 비추고 있다. 노 권사는 남은 햇볕을 향해 걷는다. 금세 어두워진다. 훅 불어온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올 것이다. 어김없이 봄도 온다. 언제나 그랬듯 잘 견뎌낼 것이다.


Photo by Federico Respin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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