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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16. 2023

내 미움은 닮아있다

〈교회 가기 싫은 날〉9.

겨울이 봄의 옷을 입으면 짙어지는 미움이 있다. 나는 S가 S라서 싫었다. 책을 펼치는 손, 흥얼거리는 콧노래, 나긋한 발걸음 모두 눈엣가시였다. S는 조용했지만 입을 열면 비수를 쏟아냈다. 이미 심장에 박힌 말이 많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네가 뭐라고?”, “너 이해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S가 내뱉은 말들이 수없이 되살아났다. 상상 속에서 캐묻고 따지고 변명했다. 나는 또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워진 날이었다. S는 자신만의 세계를 자부했지만 나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였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위로하는 듯한 S의 미소였다. S는 내가 이토록 S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자주 그날의 S를 폭로하는 꿈을 꿨다.


Y 목사에 대한 미움은 훨씬 강렬했다. 지나친 선망이 지겨운 미움이 되었다. 그 마음이 극에 달했을 때, 교회를 떠났다. 마주하며 겪는 울분은 줄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격전 중이었다. 책을 읽으며 ‘책임 전가’, ‘나르시시즘’, ‘강박증’ 같은 말에 밑줄 치고 그를 떠올렸다. 같은 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사 50:7) 그에게는 내가 ‘모욕하는 자’이자,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자’일 터였다.


추운 봄날, Y 목사와 스쳤다. 교회를 떠난 뒤 한동안 보지 못했다.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백 번 상상했다. 인사를 해야 할까 모르는 척 지나칠까 망설이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그려보곤 했다. 나는 운전 중이었고, 그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다행히 눈길은 닿지 않았다. ‘자전거 심방 하나?’ 생각했다. 참 한결같았다. 처음에는 그런 Y 목사를 보고 감탄했다. 하지만 그조차 자주 하는 일은 아니었고, 눈도장 찍기에 바빴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쯤으로 여겼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니 아직도 곪아 있는 내가 가여웠다.


Y 목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학자처럼 말하게 하신다’(사 50:4)고 말하곤 했다. 그는 ‘목사’보다 ‘학자’에 가까웠다. Y 목사는 설교 시간마다 사랑, 믿음, 정의 같은 근사한 결론을 내놓았지만, 그 말들은 사무실 문턱을 넘지 못했다. Y 목사는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단단히 규정했다. 내가 물었다. “그런 판단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까요?” Y 목사는 성경 구절을 덧붙이며 답했다. “그걸 상처라고 느끼는 사람이 잘못이죠.”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성경만큼 좋은 도구도 없었다.


Y 목사는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눴다. 다양한 빛깔과 고유한 무늬를 지닌 저마다의 삶이 광채를 잃었다. 강자와 약자, 지옥과 천국, 돕는 자와 도움 받는 자, 그 이분법의 끝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자와 자신의 말을 듣는 자였다. 나는 처음에 후자였으나, 전자로 옮겨졌고, 목사의 말을 거역한 자, 강자, 지옥의 사람이 되었다. 환대가 환멸로 바뀌자, Y 목사의 모든 말이 힘을 잃고 바스러졌다. 설교 시간에는 ‘당신부터 잘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보지 않으면 지워질 줄 알았다. 그에 대한 미움을 끊어내겠다고 누르고 밟고 보듬고 안으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미움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출몰했다. ‘이건 사랑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Y 목사에 대한 미움은 농도로 본다면 순도 99% 잿빛 미움이었다.


지인의 블로그에서 L 목사의 이름을 발견했다. 지인과 통화를 하고 반가움과 어색함이 번졌다. 내가 묻어둔 이름, 마음에 엉켜있는 매듭이 주르륵 풀렸다. 나는 결혼식 사진을 보지 않는다. 아프다. 사진 속 두 목사를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례를 한 Y 목사와 기도를 한 L 목사 모두 과거형이다. Y 목사에게서 내가 스스로 떠났다면, L 목사는 떠나보냈다. L 목사는 결혼 전까지 다닌 교회의 목사이다. 나는 동네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교회에서 자랐다. L 목사는 내가 스물네 살 되던 해, 새로 부임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L 목사와 아버지 사이가 틀어졌고, 그 후로 보지 못했다.


추억 한 톨 남기지 않고, L 목사와 관련된 것은 깡그리 모두 지웠다. 아버지의 딸인 나의 운명이라 여겼다.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런데 나는 괜찮지 않았다. 전혀 의식하지 못한 그리움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예상하지 못한 물결이 일었다. 미움의 파문이었다.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고 할까. L 목사에 대한 미움은 가장 맑았다. 농도로 치면 1%, 흰 바탕에 점 같은 먹빛이 녹아든 미움이었다. 그 미움은 따뜻했다. 사랑에 더 가까워, 미움이라 말하기 아까웠다.


사랑과 미움은 같은 선에 있다. 사랑을 흰색, 미움을 검정으로 놓고, 밝기에 따라 흰색을 0, 미움을 100이라고 한다면, 우리 마음은 0과 100 사이에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 미움일까. 내 마음 안에는 0의 상태인 완전무결한 흰색도, 100의 상태인 시궁창 같은 흑색도 없다. 모든 감정은 사랑과 미움의 다른 배합으로 섞여 1부터 99 사이에 놓인다. Y 목사에 대한 99의 미움, L 목사에 대한 1의 미움을 바꿔 말하면, Y 목사에 대한 1의 사랑, L 목사에 대한 99의 사랑이 되는 것이다. S에 대한 미움을 농도로 보면 50이다. 그것은 사랑일까 미움일까. 그토록 미워하는 것은, 사실 지독히 사랑하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 사랑과 미움이 있다. Y 목사를 좋아할지 싫어할지 헷갈렸다. 그를 미워하겠다고 어렵게 다짐했는데 이따금 그리웠다. 설명할 수 없는 미련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네가 시골로 시집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외로울까 걱정했어. 그런데 교회에 젊은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시니 다행이었지.” 내가 말을 잘랐다. “그런 적 없어.” 엄마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좋아했잖아. 학식으로나 생활면으로나 존경할만하다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지만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수요 예배 마치고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함께 읽었다.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보낸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이 담긴 편지를 보며 보수적인 신앙의 틀에서 벗어났다. 닮고 싶은 지성이었다. 공부방을 운영하며, 새로운 교육을 그렸다. 함께 다녀온 구리의 대안학교는 같은 꿈이었다.


옮긴 교회는 아직도 낯설다. 온라인 예배 덕분에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상관없었는데, 문제는 교회에 가면서부터였다. 둘째는 예배실로 쭈뼛거리며 들어가 금세 서글퍼졌다. 예배실 앞에 있는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첫째는 찬양, 예배, 분반공부까지 잘했다. 하지만 그날 밤, 첫째가 울기 시작했다. “교회 가기가 싫어. ○○교회 다시 가자.” 아이들이 자기 빼고 모두 이미 친해서 끼는 게 무섭단다. ‘돌아갈 수 없어. 이미 끝난 일이야. 잊어.’라고 말하려다 말고 나직이 고했다. “엄마도 그리워. 보고 싶어.” 가슴이 먹먹해 잠들지 못했다. 이미 겪은 마음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7년간 다닌 교회. 아무리 헤아려도 어른들의 문제를 다 알 수 없을 터였다. ‘엄마도 그래. 너무 미워서 화가 나는데, 어떤 간절함이 밀려와. 돌아가고 싶어.’ 서로의 마음 곁에 고히 머물렀다.


Photo by Lightscap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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