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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니 Mar 04. 2022

그늘 예찬

그늘과 밝음은 하나다.


                                         

 초파일에 쓰이는 종이꽃을 만들기 위해 주르르 분홍 물이 떨어지는 한지를 양손으로 맞잡아 올려 널빤지에 펼쳐 말리는 장면입니다. 도환 스님과 강호가 대화를 하네요. 그늘에서였겠죠..
"그늘에 말려야 빛이 안 바래거든요."
"이상하게도 안 변해야 할 것들은 꼭 그늘에서 말리지요?"
"그늘.. 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관목(棺木)도 그렇고, 거문고 만들 오동나무도 그렇고, 집 지을 서까래 기둥목도 그렇고, 이런 종이 한 장까지도."
"그것뿐입니까? 아, 저 판소리에서도, 또랑또랑 목은 별로 치고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심금을 울리는 깊은 맛이 오묘하게 우러난다지 않아요?"
"세상 이치가 묘할 따름입니다."


최명희의 <혼불>에 나오는 대목이다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있다.

아마도 내 마음속의 그늘이 소설 안에서 그늘을 칭찬해주는 다양한 표현들에 공감했을 것이다.

확신컨대 내 마음속에는 그늘이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늘 본능적으로 밝음을 추구한다.

밝음 안에는 곧음, 여유, 풍요로움 같은 긍정적인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덜 굽어있는 것도 많이 굽은 것 앞에서는 곧아 보이는 것처럼 굽었다 혹은 곧다는 것이 불변의 모습은 아니듯이  우리가 옳다고 믿고 추구하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결정되는 불안정한 가치들일뿐이다.


당연히 그늘과 밝음도 예외는 아니다.

그늘과 밝음이라는 것의 경계 자체도 모호하거니와, 호롱불 앞에서는 백열등도 밝음이지만  희미한 백열등도 환한 형광등 앞에서는 그늘이 될 수 있으니까.

그늘도 밝음도 우리가 분별해서 고정시키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그늘도 아니고 밝음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그 순간에 내 마음이 취하고 싶어 하는 가변적인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그늘과 밝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하며, 때로는 번갈아 출현하며, 그저 매 순간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완벽하게 해 줄 따름이다.

그늘이 밝음으로 비치고 , 밝음이 그늘로 변하기도 하면서.


둘이 결코  헤어질 수 없음에도 굳이 밝음만을 추구하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애초에 전혀 실현 가능하지 않은 일에 전력으로 도전을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얼마나 삶이 팍팍하겠는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 하는 사람>이라는 정호승 님의 널리 알려진 시다.

그늘을 사랑한다는 시인의 시는 스스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겠지만

나는 시인과 달리 그늘을 특별히 사랑하지도 내치지도 않는다.

물론 특별히 밝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매 순간 내 마음의 뜰에는 구름이 해를 잠시 가리면 그늘이 생기고

또 구름이 지나가면 햇살이 온 뜰을 비출 뿐이라고 생각한다.

때로 그늘을 지나 캄캄한 폭풍 눈보라가 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황홀한 햇살이 온 뜰을 어루만지기도 하듯이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내가 머무는 그 순간의 그 뜰은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모두가 완전하고 완벽하고 필요한 모습일 뿐이다.

무엇 하나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저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을 즐기면 된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다.


삶을 그늘과 밝음으로 규정짓는 순간 힘들어진다.

그늘도 밝음도  같은 한줄기 빛의 다른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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