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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Jun 25. 2021

기다리는 마음

말보다 큰 위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시간은 그렇게 많은 걸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난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고 생각하지만, 소독하고 약을 바르며 계속 돌봐주지 않으면 덧나서 다시 아프거나 흉터가 오래 남는다. 저절로 괜찮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물리적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멈춰진 시간 속에 갇혀 견뎌야만 한다. 그걸 알고부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쉽게 건네지 않으려 한다. 시간 속에 갇힌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그냥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라는 이야기뿐이다. 물론 내가 꺼내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시간을 버텨내는 것은, 삶은, 모두 자신의 몫이므로.


시간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 멋대로 흐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버티며 살아낸 자신이다. 시간만 믿고 기다리다간 상황에 잡아 먹히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무책임한 시간보다는 그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을 믿는다.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과 때로는 매우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버텨 온,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그 사람의 삶을 말이다.


인생영화가 몇 개 있지만 꼭 하나를 꼽으라면 <미스 리틀 선샤인>이다. 모자라고 모난 캐릭터가 여럿 모인 가족이 함께 버스를 타고 삐걱거리는 여행을 떠난다. 영화라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사실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이상하지만 완결성 있는 각자의 질서 안에서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낸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아무리 가족이나 친구라도 어찌해줄 수 없다. 영화 속 인물들도 각자의 좌절을 안고 있지만, 종국엔 전부 혼자 이겨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이 가족은 엉망진창으로 서로 부딪히더라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상대의 모난 부분을 특별한 점으로 받아들이며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어깨를 끌어안아 준다. 괜찮아질 것을 믿고 기다려 준다. 낡고 고장 난 버스를 타고 함께 있어 주는 것 외에, 사랑하는 타인의 삶에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꽤 오래전 벚꽃 시즌에 멀리 여행을 떠났다. 그때 살던 바다 앞의 집은 봄마다 단지 내에 벚꽃이 가득 피었다. 엄마는 한창의 봄날 떠난 내가 그 풍경을 보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러나 활기찬 런던의 공기가, 익숙한 듯 낯선 파리의 골목을 걷는 게 더 좋았다. 가족의 염려는 그때의 내게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내 삶에 대한 무게가 가족보다는 적은, 그러나 나를 아끼는 친구들의 품에서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고, 한 차례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전부였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엄마가 그랬다. "너를 기다리는 벚나무가 하나 있어."라고. 벚꽃 다음에 피는 겹벚꽃이었다. 벚꽃이 피고 지는 내내 나를 기다리며 내 마음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겹벚꽃이 망울 맺는 걸 보며 내 인생이 다시 피기를 바란 엄마의 기다림이 거기 있었다. 진짜 시간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시간, 관계를 잇는 시간은 때때로 무한정으로 우리를 기다려 준다.


오늘은 멀리 있는 친구의 소식에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마침 내가 보낸 카드가 도착해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었지만. 사실 국제우편은 EMS밖에 안 된다는데 조그만 카드 하나를 몇만 원 주고 보내는 게 손 부끄러워서 나중에 선물이라도 사서 같이 보낼까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날 꼭 보내고 싶었다. 그게 적당한 날 도착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오후와 저녁을 보내는 동안 친구에게는 아침이 왔고 다행히 지금까지 큰 탈은 없다 해서 한숨 돌렸다. 근황과 사소한 농담을 나누는 잠깐이 유난히 소중하고 고마웠다. 친구에게 쓴 카드처럼 나는 그가 지금 또한 잘 살아낼 것을 믿는다. 지금까지도 시간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잘 살아낸 것처럼.


마음이 클수록 위로의 언어가 서툴다. 말이나 글자가 얼마나 가볍고 허무할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 글자 사이에 위로와 사랑을 담아 본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간과 행간에서 그 마음을 두 손 무겁도록 찾아내 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글쓰기가 전혀 무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 본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건 오래 전의 나를 기다려준 벚나무의 마음처럼 그저 기다려주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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