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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협주곡...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2024년 3월 8일

by 행크

며칠 전 하남에 새로 회사를 세우고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낸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하남은 서울의 동쪽에 있고 집은 서울 가운데 있다보니 퇴근 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게 된다. 자동차 창 밖의 해는 서쪽 멀리 아파트의 숲 뒤로 넘어갔지만, 하늘엔 아직 붉은 기운이 많이 남아서 어둡지도 않고 너무 밝지도 않아 눈이 편안하다. 올림픽 대로에서는 쉽게 느끼기 힘든 운전의 즐거움을 느끼며 달리고 있지만, 머리 속은 그 즐거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새로 만든 회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생각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에 처음으로 회사를 세운 이래 2012년, 2018년을 거쳐 2024년인 이제 네번 째 회사를 만들었는데, 이전 세 번의 회사들을 정리할 때 한번도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만큼은 잘 하고 싶다는 의욕-또는 욕심-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서로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마음 속 그릇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이러한 어지러운 생각은 결국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원치 않는 얼룩이 그 마음의 결 사이로 끼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데, 마치 아스팔트 공사에 들어가는 검고 찐득한 타르가 몸에 묻는 것 같다. ‘음, 안좋은 징후로군.’ 이라고 마음 속 다른 내가 한마디 던지지만 여간해서는 떨쳐지지 않는다.


이럴 때는 서쪽 하늘의 은은한 그라데이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무의식적으로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고, 발은 페달을 밟았다 떼었다 할 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마치 계시라도 내리는 것처럼 자동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어떤 음악이 귀에 그리고 마음에 ‘화악’하며 들어왔다.


조심스럽고 살짝 머뭇거리는 것 같은 피아노 소리가 잠시 이어지다가 뒤이어 무거운 관현악 합주가 흘러나오는데, 마치 지금의 내 마음을 소리로 바꾸어 들려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이어 처음의 피아노가 관현악 합주 위를 가볍고 부드럽게 노닐면서,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는 슬프다 할 수도 있는 합주 소리를 감싸안는다. 그 피아노는 천사인 것도 같고 숲의 요정인 것도 같은데, 때로는 슬픔에 공명하여 더 슬픈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결국은 무겁고 슬픈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달래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얼룩들이 한 순간 깨끗하게 씻겨져 나가고 있었고, 조금 울컥하며 눈가가 붉어졌다.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아니면 스스로가 불러오는 슬픔과 불행과 또는 불가해한 상황에서 해결은 고사하고 견디는 것조차도 힘들 때, 그 때를 견디게 해주는 음악을, 그림을, 시나 소설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싸고 지켜주고 끝내는 구원하는 그 순간. 나는 어느 저녁 올림픽 대로의 잠실대교와 영동대교 사이를 지나면서 그 순간을 만나고 있었다.


샤를 페팽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2017년 즈음이었다. 내가 몇몇 선배들과 설립하고 10년이 넘도록 운영해온 회사를 결국은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때였다. 당연히 심란하기 그지 없던 시간들이었다. 나에게는 한번씩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버릇이 있는데, 심란하던 그 당시에도 별 생각없이 교보문고를 들렸었다. 하던 대로 책들을 뒤적이기도 하고, 그냥 멀리서 가만히 책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 제목이 있었는데, 바로 페팽의 책이었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없이 책을 집어들었고, 두 세 페이지를 읽고 나서는 망설임 없이 사들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책 제목대로 저자는 우리가 어쩌다 느끼는 예술적 감흥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약간 어렵긴 했지만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떤 예술 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이 책 자체가 나에게 잠시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알려주고 열어주는 기분이었다. 구원까지는 아니지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할까.

물론, 훌륭한 작품이 주는 감동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결코 그런 것을 기대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그 감동과 뒤이어 찾아오는 마음의 정화는 우리가 자신의 문제에 다시 맞서게 도와주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중심을 놓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견디는 힘이 되어 준다.


이 책은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을 구원했는지, 그 이후로 ‘샤를 페팽’의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었고 그의 책들을 사서 읽으며 즐거운 독서의 시간들을 가졌었다. 그리고 오래전 읽었던 이 책을 기억 속에서 다시 끌어올려준 올림픽 대로에서의 그 음악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아다지오’이다. 지금도 마음이 어수선할 때면 한번씩 이 곡을 찾아듣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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