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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건지감자껍질파이북클럽

2022년 6월 15일

by 행크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마치 장맛비처럼 내리는 걸 보면서 여름이 성큼 와있음을 깨닫는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내리는 비에 끌려 아파트 복도로 나가 잠시 비 구경을 하다 보니, 문득 대학생 때 갔던 농촌활동이 떠올랐다.


우리 과 학생들은 충청남도로 농활을 갔는데, 1 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농활을 가는 시기가 6월 말이어서 장마철과 겹치다 보니 농활 기간 동안 비를 참 많이도 맞았었다. 그래도 맑은 날보다는 비 오는 날이 좋았던 게 맑은 날은 너무 더워 밖에 10분만 서있어도 땀으로 샤워를 하는 것 같았고, 그런 날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김매기라도 하게 되면 어깨, 허리, 종아리 할 것 없이 쑤시기까지 해서 정말 힘들었었다. 그럴 때, 비가 한바탕 시원하게 내리면 흙과 몸의 열기를 식혀서 그나마 견딜 만했던 것이다.


하루는 비가 아주 많이 내려서 오늘은 쉬려나 은근히 기대 -농활 간 학생의 자세가 안되어 있다- 하고 있었는데, 일손 부족한 농촌에서 비 좀 온다고 20대의 젊은 애들을 놀게 할 리가 없었다. 그 대신 좀 쉬운 일을 한다며 따라오라 해서 갔더니, 감자를 캐는 일이었다. 과연 다른 일보다는 많이 수월했는데, 무성하게 자란 감자 줄기를 잡고 슬슬 잡아당기면 비에 젖어 부드러워진 흙 아래 굵은 감자들이 뿌리와 함께 술술 달려 나오는 것이다. 여남은 개씩 올라오는 감자들을 보면서 작은 쾌감도 느끼기도 했는데, 흥이 나서 감자 줄기를 마구 당기다 보면 줄기가 끊어지기도 하고 달려있던 감자들이 흙 위로 올라오기 전에 떨어져 흙 속에 묻혀서 나중에는 일일이 호미와 손으로 캐내어야 했다. 공부나 좀 할 줄 알았지 몸 쓰는 일에는 젬병이었으니 결국 두 번 일을 하는 셈이었다.


이때 아주 작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흙 속에 묻혀 있는 감자들을 호미로 캐다 보면 감자가 상처를 입게 되고 상처 난 감자는 시장에 내다 팔 수 없게 되니 농가에서 먹어 없애야 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농부 아저씨 -어쩌면 할아버지- 가 “학생들 서울 돌아갈 때까지 감자만 먹게 생겼네.” 하며 껄껄 웃으신다. 무슨 말씀인가 했는데 일 끝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보니 숙소 마당에 커다란 붉은색 다라이 -커다란 대야-에 가득 상처 난 감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와 쌓여 있는 게 아닌가 … 농부 아저씨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날 저녁부터 집에 갈 때까지 감자와 함께 하였고, 찐 감자부터 시작해서 감자밥, 감자볶음, 감자조림, 감자된장국에, 심지어 라면에도 감자를 넣어 먹었었다.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자기 전에 술 한 잔 하면서 서로 이야기 나누던 시간에도 안주는 감자로 만들어진 -대부분은 그냥 삶은 감자- 어떤 것이었으니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 남짓 짧은 농활 기간 동안 이런저런 다른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그중 감자에 대한 추억이 이렇게 불쑥 떠올랐던 것은 아마도 얼마 전 읽었던 ‘감자’가 제목으로 쓰인 소설 때문일 것이다.


세계 2 차 대전과 그 직후를 배경으로 하는 영국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지난해 말부터 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북클럽에 대한 내용임에 분명한 이 책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펼쳐 보니 조금 낯선 편지 형식의 소설인 데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첫 번째 주인공이 -주인공이 두 명이다-다소 수다스럽게 편지를 써 내려가는 바람에 초반에는 집중이 안되었지만, 등장인물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상당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 앉은자리에서 다 읽게 되었는데, 그 흡입력의 정체는 두 번째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건지 섬의 북클럽 멤버들이다.


두 번째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독일군 점령 하의 건지 섬에서 자신과 섬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며 홀로 빛을 뿜어낸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전쟁의 몰인간성 아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다 결국 비극적 운명을 맞지만 그가 뿜어낸 빛은 북클럽 회원들의 마음에 남아 결국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 본토에 사는 첫 번째 주인공 줄리엣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모두는 엘리자베스가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자 빛인 어린 딸 킷을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는 것으로 그를 기린다. 이 모든 이야기는 북클럽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감자껍질파이’를 이름으로 하는 북클럽을 즉석에서 만들어낸 건지 섬 어느 오솔길에서 시작되는데, 감자껍질파이가 어떤 음식인지는 같은 이름의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다지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힘든 시간, 목숨을 걸고 열정적으로 살아간 엘리자베스나, 그의 삶을 더 많이 알고 싶어 안정적인 생활을 버리고 섬으로 떠나는 줄리엣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여기서 오래도록 내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것은 조연에 해당하는 북클럽 회원들의 모습이었다. 그리 똑똑하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이 힘든 시간을 견디게 도와주었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이를 함께 키우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기억의 오솔길을 따라 예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에 다다랐다.


지금은 문을 닫은 종로의 단성사에서 보았던 영화 <오래된 정원> - 황석영의 소설이 원작이다- 에는 1980 년대 학생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서 언제 출소할지 알 수 없는 남자친구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여자가 나온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여자의 엄마는 딸에게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는지 묻는다. 여자는 대답한다, “그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은 것”이라고.


이렇게 시대도 다르고 장소도 다르지만, 자신과 사람들을 위해 빛을 뿜으며 살다 간 사람들이 있고, 곁에서 그 빛을 받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전쟁이나 독재 같은 비극은 더 이상 없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문학작품에서 또는 현실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저런 이들을 보노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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