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삼월>
3월 15일 아침, '지이잉' 진동과 함께 알림 창이 떴다.
1월부터 학교 커리어지원센터에서 메일이 자주 온다. 취업을 한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앙케트 조사 협조 요청 메일, 아직 就活(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에게 보내는 각종 구인정보, 그리고 학비를 아직까지 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불이익을 입게 되는지 등의 경고. 하루가 머다 않고 도착하는 메일을 대충 읽고 넘기기 바쁘다.
가만있어보자. 오늘이 삼월 십오일. 무슨 날이더라? 분명 3월 15일에 어떤 사건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차차! 4월 혁명의 계기가 된 3.15 부정선거가 행해진 날이다. 수업시간에 그렇게 외웠던 날짜인데 생각이 바로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다니... 왠지 씁쓸하다. 나의 기억력이라는 게.
얼마 전 3월 9일, 앞으로의 5년, 아니 그 이상의 대한민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201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참여한 대통령 재외선거였다.
오랜만에 한국인으로 꽉 찬 공간, 왠지 설레고 긴장됐다.
"주민등록증도 괜찮죠?"
앞에 서 있는 연세 지긋하신 분이 현장 안내자에게 물었다.
"네, 그럼요. 한국 신분증 모두 다 되고 말고요."
반달처럼 웃는 눈의 앳된 관계자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이고 좋네. 여기만 와도 내 나라 온 것 같이 좋네 좋아."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신분증을 내밀었다.
"한국에 살지도 않는데 투표는 해서 뭐해! 내가 원하는 사람이 뽑힌다는 장담도 못하는데..."
"아무나 되면 어때. 그놈이 그 놈이지."
불편한 몸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일부러 찾아와 투표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떠나 온 조국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도 있다. 누가 되어도 좋으니, 한일 관계 좋아져서 나한테 피해만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선거 참여율이 우리나라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온 탓일까. 정치 이야기만 하면 "일본처럼 하라 그래. 지지고 볶고 뭘 하든 대출 잘 나오고 집값도 싸고 실직자도 적고 잘 살잖아? 맘대로 해 쳐 먹어도 국민들은 살게 해 주잖아."라며 거침없이 내뱉는 사람과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한국에 있을 때도 물론 정치 얘기 잘 못 꺼냈다가 서로 얼굴 붉히며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누구나 같은 생각이나 가치관을 요구할 수 없으니 말이다. 헌데, 이토록 선거와 투표의 중요성에 대해 무관심한 이들을 만나게 되면 뒷골이 당기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있어서 소중함을 망각하고 지내는 그 권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 번쯤 말하고 싶은데 상대는 전혀 틈을 주지 않는다. 두 손은 귀를 꽉 막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치켜뜨고, 실룩거리는 입꼬리는 마스크를 뚫고 나올 정도이다.
선거는 끝났다. 대한민국은 반으로 크게 나뉘었다. 그 반 속에 포함되지 않은 소수의 의견은 어느 때보다 더욱 희미해지고 있다. 선거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는 3월.
하늘을 올려 보며 울고, 술잔을 내려다보며 울고, 시끄러운 소식 듣기 싫다며 사회관계망(sns)을 끊은 이들도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 약속한 다음 정부를 기대하며 희망의 축배를 들고 있다. 특정 공약이 자신의 삶과 직결될수록 더 크게 지지하는 만큼, 당선인의 공약을 하나씩 되짚으며 행복한 상상을 하는 이도 있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이 두 부류 사이에는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담이 자꾸만 높아져간다.
어느 때보다 통합과 이해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갈등과 분열만 남아있는 뜨거운 3월을 바다 건너에서 지켜본다.
1960년 4월.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거리고 뛰어나왔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2022년 3월, 그 시절 '껍데기는 가라'며 노래하던 4월의 청년들이 꿈꿨던 대한민국은 잘 나아가고 있을까. 목숨을 걸고 싸웠던 4월 혁명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3월, 다시 봄바람은 부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 한다. 62년 전에도, 지금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광장으로 뛰쳐나간다. 누군가는 한 해가 다 되어가도록 천막 생활을 하며 농성 중이고, 누군가는 몸뚱이 앞뒤로 피켓을 뒤집어쓴 채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삼월>
신동엽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드리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들은
광화문 창 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 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 앞
걸어가는 행렬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뻐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이여, 동학이여.
금강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이 오기 전,
야산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이나 깎아버며 살거나.
<현대문학> 196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