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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행자 Sep 25. 2021

가해자의 고백

내면아이

  2020년.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 코로나가 터졌다. 남편은 감사하게도 그 시기에 딱 배달 장사를 시작했고, 한 달 내내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새벽 2~3시에 들어와 아침까지 시체처럼 자다가 출근 전 10분 전에 일어나 씻고 후다닥 나가느라 아이들은 아빠와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었다. 내 대학원 일정과 일은 코로나로 인해 출렁였고, 아이들 일정도 출렁였다.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일상 속에서 내 안의 악마는 더 악랄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왔다. ‘아동학대 캠페인 OX퀴즈’라는 통신문이었다. 각 항목이 아동학대에 해당하면 O, 아니면 X를 표시해보라는 문항이었는데 아래 항목은 전부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1.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곤 했다.

2. 고함과 욕설이 섞인 부부싸움에 아이가 노출되었다.

3. 필요한 예방 접종을 제때 해주지 못했다.

4. 식사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밥을 빼앗고 가족의 식사를 구경하게 했다.

5. 떼쓰는 아이를 홀로 격리하였다.     

  부끄럽게도 3번 빼고는 모두 해당했다. 부부싸움은 지금은 말다툼으로 끝나지만 아이들이 더 어릴 때는 고함이 오가기도 했다. 떼쓰고 울고 짜증 부리는 아이에게 방으로 가서 울라며 자기 방에 데려다 놓고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아이의 감정보다 내 감정에 매몰돼 아이의 감정을 무시했다. 아니, 억압했다. 나는 정작 화가 날 때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 놓고는, 공격적으로 소리 지르는 첫째의 행동을 억압했다. 밥을 깨작깨작 혼자 늦게 먹는다고 밥을 그만 먹으라며 빼앗아 싱크대에 버리기도 했다. 또 항목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체벌도 했다. 외투를 잃어버리고 왔다고, 샤워를 하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고, 동생과 싸운다는 등의 구실을 들어 ‘효자손’으로 때렸다. 꿀밤을 때리기도 했고, 거칠게 아이를 밀어내기도 했다. 첫째를 체벌하는 모습을 보고 둘째가 겁에 질려 울기도 했다.  

   

나는 아동학대 가해자였다.     


  내가 이럴 줄 상상도 못 했던 건 아니었다. 지체장애 4급인 아빠와 지체장애 2급인 새엄마에게 고3 때까지 맞으며 자라다가 고3 때 집을 나와서 살기 시작한 나의 유년시절이 나의 가정에 영향을 미치리라 짐작은 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 후 남편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문제의식도 있었다. 싸우고 폭언하고 울고 나름 할 수있는 방법을 찾다가 생전처음 부부심리상담도 찾아가봤다. 그런데 처음 심리상담을 받고 온날, 남편이 잘하겠다며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그래서 2회 차부터 상담은 가지 않았다. 사실 장기적인 상담비용이 부담돼, 남편의 사과로 일단락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당연히 갈등은 멈추지 않았고, 이번엔 신앙에 기대 보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잠깐밖에 다니지 않았던 교회를 다시 나 홀로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첫애가 5살, 둘째가 3살이 되는 해였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면서 “부부학교”도 남편을 설득해 같이 수료했다. 교회의 여러 양육과정, 내적치유 과정에 참가하면서 나의 내면에 많은 상처들이 곪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편이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화가 나고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게 아닌가? 내 안의 상처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지? 내 아이들이 부부싸움에 노출돼 상처 받는 일이 없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남편이 고칠 수 없다면 내가 문제인가? 내 어릴 적의 상처가 지금 나에게 어떤 상관이지? 내 부모와 나의 관계가 문제인가? 하는 의문들이 떠올랐다.

  이상했다. 어릴 때 나의 부모에게 품었던 복잡한 감정들은 모두 묻어두고, 지금은 내 아이들에게 외가가 있다는 것에 타협하고 있었다. 과거는 모두 잊고 남들처럼 평범한 친정으로, 평범한 딸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엄마가 되었으니 어렸을 때의 상처는 어른스럽게 덮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덮어둔 내 상처는 보이지 않게 곪고 있었다. 시작은 남편과의 갈등이었지만 이렇게 내 내면의 문제로 초점을 돌리고 난 후 나는 나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첫애가 6살, 둘째가 4살 되던 해. 코칭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나를 알기 위해 ‘코칭’도 받기 시작했다. 살면서 성인이 된 후 읽은 책은 10권 남짓 될까 싶은데,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6개월 동안 읽은 책은 80권 가까이 되었다. 대학원에 입학해서는 심리 공부와 코칭 실습을 병행했다. 대학원에서 공부한 지 3학기가 되었고 정토불교대학에 입학원서를 냈을 때 첫째 아들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에 대해 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지 3년째였다. 꽤 나아지는 줄 알았던 내 안의 악마는 코로나로 폭발했다.

  3년 동안 교회에서 내적치유 수양회도 다녀오고, 멘토 코치님께 코칭 상담도 주기적으로 받고 있고, 육아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고, 대학원에서 코칭 이론과 실습도 하고 있어서 아이들의 감정을 읽어주는 데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아니었다. 나 지금까지 뭘 배운 거지?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청소년대상의 1:1 자기 주도 학습 코칭이었다. 그와 함께 학부모 상담도 하고 있는데 내 아이들에 대해서는 왜 헤매고 있는 건지 고통스러웠다.  '코치라고 하는 내가 내 아이들에게 왜 윽박질렀지, 왜 그 정도 실수에 나는 화를 벌컥 내버리고 말았지, 왜 좀 더 다정히 말해주지 못했을까?.'

  자책이 견디기 힘들 때는 한켠에서 나를 합리화 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화낼 때 말고는 평소에 책도 잘 읽어주려고 하고 아이들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잖아. 청결에 신경 쓰고 아이들을 면밀히 살피고 양육하는 걸. 지금도 이렇게 책을 읽고 배우고 늘 노력하는걸. 완벽할 수는 없잖아.' 내 안은 혼돈이었다. 나를 합리화하다가도 자책했다. '근데 밖에서 나를 보며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런 날 보면 충격받을거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폭발하는 내가 너무 혐오스럽다 정말. 이런 내가 어떻게 코칭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갖 자책과 반성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마주하는 그 순간에는 이성을 잃고, 내 안의 악마, 내면 아이가 외쳤다.  

    

“나는 더 심하게 맞고, 더 심한 인격모독을 받고도 자랐는데 이 정도가 무슨 아동학대야! 내가 왜 가해자야!!!"     


  왜? 왜 아이들과 맞닥뜨리면 책에서 읽은 대로 할 수 없을까? 내 내면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내면아이. 내면아이가 문제였다. 물론 코로나도 한몫을 했을 테다. 거기다가 남편이 없는 저녁과 주말 내내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컸다. 매일 저녁마다 아이들과 실랑이하고 아침에는 아이들을 보내고 울면서 집안일을 했다.  일상이 지옥이었다. 덕분에 더 절박하게 내 내면아이를 아는데 매달렸다.


  첫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코로나로 일상이 예측할 수 없었던 때, 내 내면아이가 가장 폭주했던 해, 그때의 생생한 고통 속에서 나의 내면아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를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단서들을 많이 찾으며 평온해졌다. 그 과정을 잊지 않고 기록하려고 한다. 누군가 나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면, 그 누군가에게도 나의 경험이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아동학대 피해자였으며 가해자가 되었던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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