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랑시인이자 철학가이고 싶다. 삶을 탐구하고 들여다보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싶다. 몸을 쓰고 근육을 하나하나 느껴보고 싶고 내 목소리가 어떤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악기를 배워서 아름다운 소리가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흘러나오는 황홀함을 맛보며 살고 싶다. 춤을 추며 흐르는 땀을 느껴보고 싶고, 만나지 못하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책 속에서 삶에 대해 토론하고 질문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가 가져야만 하는가? 내가 소유해야만 하는가?
나는 상처받고 고통받는 아이들이 없으면 좋겠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영혼들이 상처받아 부정의 에너지를 내뿜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스스로 삶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 일을 위해 그 아이들이 가장 먼저 사랑을 경험하는 대상인 부모가 건강해야 하고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부모들 역시 받지 못한 사랑을,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치유받기를 원한다. 내가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했던 그 시간들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내 아이들 역시 그런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고, 내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다른 아이들 역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낱 수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인 내가 거대한 신의 계획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생각이 미치면, ‘그 상처와 고통이 그들을 위해 계획된 길이라면?’이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내가 그런 사명을 위해 공부하고 나누는 이 시간들이 신의 계획을 망가뜨릴 만큼 거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스캇 펙의 책에서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감히 신의 영역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엄마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일은 아팠다. 다 내 탓인 것 같고, 내가 문제라는 말은 나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경멸하는 감정이 휩싸이도록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성찰하고 나아가야 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그렇게 문제와 고통에서 내면을 돌아보기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닿고 싶다. 내면을 돌아보고 자유를 되찾고 ‘사랑’ 임을 깨닫는 여정을 같이 가자고. 그렇게 닿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내가 경제적 자유를 얻는 일이고 소유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일까? 좋은 수입차를 끌고 내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내가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는지, 내가 어떠한 집을 ‘소유’했는지가 나에게 중요한 일일까?
아직도 내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들은 더 가지고 싶어 하고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고 권력을 맛보고 싶어 한다. 그럴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오로지 과거의 나만 보기 위해 애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나는 잘 가고 있는가? 그것을 가지는 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또 그것의 소유는 세상에 어떤 가치를 주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날뛰던 욕망은 잠잠해진 듯하다. 죽을 때까지 늘 사색하고 조율하고 나를 정화해 나가는 것이 삶이라면, 또 나는 흔들리겠지. 고독을 즐기며 사색하고 오늘도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을 조용히 관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