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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fessor Sunny Nov 21. 2022

정확한 모습

꼬리를 무는 생각

이번 가을학기 새로운 박사생  한명이 내 지도학생으로 들어왔다. 그 친구는 석사 때 우리 학교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 수업을 들으며 유아특수교사 자격도 함께 받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아특수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나와 굉장히 비슷한 과정을 걷고 있다. 


박사 학생 한 명이 들어오면, 나는 꽤 바빠진다. 그 학생이 수업과정을 잘 꾸려서 졸업까지 가는 requirement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주 확인하고, 중간중간 보는 시험에 조언을 해주고, 그의 시험을 리뷰해줄 다른 교수들도 섭외하고 하는 등의, ‘행정’ 일이다.  


몸과 더불어 마음도 바빠지는 이유는, 내가 그 일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를 해보지 않은 한 사람을 ‘연구자’가 되도록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박사과정에서 1년이 끝날 즈음, 우리 학생들은 시험을 본다. 본인이 주도해서 필드에 나가 작은 연구를 실행해보던지, 아니면 기존에 나와있는 문헌 리뷰 연구를 해도 되는데 그렇게 나온 결과를 논문으로 써서 제출한다. 연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초짜 박사 학생을 만나, 나는 연구의 처음부터 설명한다. 


처음. 이 필드에서 뭘 하고 알고 싶은지 생각해봐라- 이슈, 이름하야 ‘콘텐츠’. 

너무 넓지도 않고, 너무 좁지도 않은 스콥(scope)으로, 종전에 없었던 신선한 연구주제가 좋겠다. 

다음은 ‘방법’. 정한 주제를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고 해답을 낼 것인가. 

방법론은 연구자에게 어떤 형태의 연구 질문을 물을 것인가, 연구주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Lens),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를 해준다. 많은 학생들이 여기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해답을 얻어내고 싶은 이슈와 연구 질문에, 알맞은 연구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제일 많은 조언을 해준다. 매칭이 안 되는 콘텐츠-방법론은 엉망진창 연구가 된다. 


나는 ‘연구방법론’을 부전공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무언가를 창조하고 강구해내는 것보다, 이미 짜여진 방법론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연구 주제에 맞물려 끼어 넣기를 선호하는 deductive- 연역적 사고방식을 가진 나에게는, 특히 각각 다른 방법론을 다양하게 배워서, 각각의 다른 방법론 중 어떤 것이 내 연구주제에 100점의 답을 내줄 것인가를 찾아내는 방식에 참 잘 맞아떨어졌다. 


나는 몇몇의 논문을 쓰며 이런 방식을 대입해보면서  ‘방법론’ 틀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왔다. 방법론이 연구주제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준다라고 계속 생각하면서 논문을 쓸 때마다, 그러면서 내가 만나는 개개인의 사람들의 다양성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개개인의 방법론’이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나라는 인간을 봐도 그렇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40년 동안 다듬어져 왔고, 사실 나는 그 방법을 통해 세상을 살고,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남을 평가해왔다. 그동안은 나름 제법 잘 먹혀왔고, 효용성이 있는 방법이라고 평가해왔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사람은, 10년 전의 나, 20년 전의 나로 현재의 나에 대한 업데이트가 안되어 있는 상태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재미로 해본, MBTI에서는 나는 ‘사교적인 외교관’이라는 결론을 받았는데, 나는 전혀 사교적이지도, 외교를 해낼 만큼의 깜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십 년 전에 혈기 넘치던 나라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예전 대학 다닐 때쯤 해봤던 MBTI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받았던 거 같다. 

문득 드는 생각이, 이제까지 삶에 바빠서 나에 대해 생각해볼 데이터가 없다가, 이걸 작성해야 되니까, 내가 알고 있던 몇 년 전의 나를 떠올려 거리낌 없이 도입해서 쓴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스로 들었다. 아니면, 그동안 내가 나를  잘못 사용해 왔던 것일 수도. 


어찌 됐건, 지금의 나는 이런 형태의 사람이고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교수’라를 직업을 몸에 붙이고 사는 동안, ‘아름다운 직업’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사실 이 직업 자체도 잘 들여다보면, 그렇게 아름답지는 못하다. 어떤 직업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원하던 이 직업의 길을 가지기 위해서 ‘워라벨’은 근처에도 못 가봤고, 오직 ‘일’’일’이었다. 실제로도 연구하고, 가르치고 하는 루틴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거기에 더해 당첨확률이 엄청나게 낮지만 그래도 어쩌다 될 수도 있는 그랜트 (연구비용)를 따기 위해 소가 바늘구멍에 들어가 보겠다고 무식하게 머리를 들이밀어보며, 말도 안 되는 삽질을 자주도 한다. 

어느 날 아빠가 ‘일이 바쁘니?  먹고사느라 고생이 많구나’라고 문자를 줬는데, 그 문자가 그날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됐다. 나는 정말로 내가 그동안 이 직업을  ‘먹고살기 위해 하고 있다’와 연결 지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래,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꽤나 고단하구나’ 등등의 연속적인 생각이 밀려들었다. 


나는 아빠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이렇게 가끔 위로를 받는다. 나의 아빠는 용감한 듯 소심하고, 차가운 듯 따듯하고, 센 사람 같지만 연약하기도 하다. 나는 그런 사람의 유전자를 받아 비슷한 재질을 완성했고, 그가 만든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사회성의 기반을 다졌기에, 지금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와 참 닮았다. -엄마를 닮은 언니와 동생은 내가 아빠의 안 좋은 점까지 닮았다며 질색팔색을 하기도 한다- 비슷한 생활의 방법과 모양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쉽게 공감과 위로를 받고, 더 친밀히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본능적인 삶의 방법이다. 


지금 가진 이슈에 대해 해결방법을 강구할 시도조차 못했던지, 그것이 이슈라고 생각도 못해봤다던지, 시도는 했으나 방법이 틀렸던지,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다던지. 우리가 각각 어느 지점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삶에 실수율을 확실히 줄이고 조심해야 하기에, 정확한 나로 살기 위해 꽤 자주, 그리고 주기적으로 머릿속에 꼬였던 생각과 이슈를 잠깐 다시 바라보고, 풀어놓고 (untangle), 내 머릿속에 생각의 툴을 다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겠다고 한참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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