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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단향 Sep 13. 2021

당신은 "인정하다"라는 말을 쓰나요.

대인관계의 소소한 변명들 : 타인을 인정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너를 인정해" 라는 말을 써본 적이 있는가.



말린 프리지아


"인정하다"라는 말은 주로 타인을 향한다. 감히 '나'가 타인을 인정한다. 우습지 않은가. 무수히 존재하는 '나'들은 '나'조차도 모르면서 타인을 인정하느냔 말이다. 그렇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도 포함이다. '나'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나'가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꽤나 혹독하고도 처절한 죄의식을 지녀야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이기적이고 욕망에 뒤틀려 있으며 이타적이고 계산적이면서 남을 동정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존감을 충당하는, 그런 하등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애초에 자기 안녕을 바라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의 범위가 점차적으로 넓어질 뿐, 중심에는 그대 하나만 존재하고 있으리라. 자기 안녕을 위해서는 나의 가족이 지인들이 주변인들이 안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다.


첫 단계는 부정이다. 다음으로는 질타이고 마지막은 결국 수긍일 터다. 혹 당신은 "나는 욕망에 뒤틀려 있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욕심없는 상태를 욕망하는 인간"일 터다. 본디 인간은 그렇게 세상으로 엎질러졌다. "모순"이라는 키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정"이라는 단어와 공생해야만 한다.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학적인 것과 자기성찰적인 것은 동일 선상이다. "나는 좀 착해서 문제야."라고 말하는 타인보다는 "나는 호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해."라고 소개하는 이가 더 깊은 웅덩이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이 역시 모순 그 자체다. 자신의 추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군'의 덕목 중 하나라는 자아성찰의 일부일테니까.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갔음에도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지고 또다시 미워지고 돌아서고 그리워지고 돌아서고를 반복하는 젊은 영웅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나'를 혐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돌아볼 수 있다. 그게 모순이라는 거다. 부정과 질타 그리고 그 끝에 순응. 모순에는 이러한 루틴이 존재한다.


생각해보자. 기억을 조금씩 과거로 돌려보자. 당신은 지금껏 당신의 추함을 '인정'한 적 있는가. 당신의 인정은 타인을 향했는가 자신을 향했는가. 어쩌면 당신은 타인을 인정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인정하고자 했을 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추한 외면 속에서 자신의 추한 내면을 은밀히 마주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주고 타인을 배려해주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감동하면서도……. 결국은 자위밖에 되지 못함을 애써 부정해온 것. 어쩌면 그것이 당신의 '인정(人情)'이었겠지. 하지만 젊은 영웅은 말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자신의 추함을 인정(認定)하고 나서야 인정(人情)을 베풀 수 있다. 


"나는 나를 인정해." 이 속에는 무수히 많은 모순이 담겨 있다. 자신의 추함을, 그리고 자신의 존재함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를.


*윤동주 <자화상>

*윤동주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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