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단향 Sep 10. 2021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대인관계의 소소한 변명들 : 받아들임에 대하여


"나는 너를 이해해" 라는 말을 써본 적이 있는가. 



배롱나무


우리는 대화를 하며 살아간다. 아니, 대화를 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대면하지 않는 인간은 도태되고 대화하지 않는 인간은 밀폐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혐오하면서도 타인을 갈망해야만한다. 어떨 때는 타인이 원하는 말을 들어주고 어떨 때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그런 순환적인 관계를 우리는 가져야만 한다. 쏟아내지 않고 고여버린 감정은 간혹 다방면으로 터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치 않더라도 대화를 해야만한다. 원활하게 대화가 이어져야 하고, 일방적 듣기나 말하기의 행위가 아닌 상호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한다. 즉, '건강한 대화'를 해야한다. 당신은 건강한 대화를 하기 위해 어떠한 스킬을 지니고 있는가. "공감하기."라는 스킬이 보편적일 테다. "아 맞아, 네 말에 나는 동의해, 이해해, 공감해." 대화를 하다보면 긍정적인 피드백은 필수적인 요소임을 알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 당신은 정말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나와는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타인을 말이다.


필자는 단언코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한다."라는 말을 한다. 

왜일까? 

당신은 왜 그러는지가 궁금하다. 

당신은 단언코 '예'라고 답할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건 결코 나쁜 사람이되는 길이 아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해보자. 이해되지 않음에도 이해한다고 말하고 공감을 할 줄 아는 능력을 우리는 '사회성'이라는 단어로 예쁘게 포장한다. 이번에는 역으로 말해보자.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친한 친구에게, 애인에게, 직장 상사에게, 부모님에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군요."라고 말하느냐는 말이다. 그런거다. 인간관계가. 타인이라는 존재가.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데도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뼛 속까지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다. "이기심"이라는 키워드를. 인간은 욕망을 통해 행동하는 존재이다. 본인이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아보자. 그 곳에서부터 "편한 대인관계"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그나마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아가고 조금이라도 교집합이 있는 사람을 찾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모순적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만 있을까. 필자는 앞으로 이런 모순적인 문제에 대해 적어나갈 것이다. 자신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타인에게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지독한 우울증과 싸우지만 우울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가장 강하다는 것. 그런 글을 적어볼 예정이다.



필자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인정하다"라는 말을 쓰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