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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04. 2024

흰죽을 끓이며

엄마 나 배가 아파.

엄마가 흰죽을 끓여줄게.

탈이 나면 흰죽을 먹는 거야.

아기 때로 돌아가는 거야.


흰죽도 맛이 있네.

그럼. 흰죽에서도 구수한 맛, 단 맛이 다 느껴져.

흰죽도 만들기 어려운가?

그럼. 흰죽은 사랑없이는 만들 수 없거든.



엄마젖 떼고 처음 흰죽 먹던 때를 기억하니?

아니 나는 몰라.

그렇구나. 엄마는 알아. 엄마는 다 기억하고 있어.

모든 엄마들은 그래. 엄마는 누군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를 대신 기억해주는 사람이거든.


너는 정말 귀여웠어.

건더기도 씹히지 않는 멀건 흰죽을 향해 '아- '하고 벌어지던 네 입은,

'이제 엄마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하는 첫 선언이었단다.

찌르르 얼마 남지 않은 젖이 불어 몇 방울 솟아나는가 싶더니 이내 말라버렸어.

엄마도 생각했지.

그래. 너는 이제 젖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거야.



흰죽은 언제까지 먹어야 ?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끔 그렇게 많이 아플 땐. 허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때까지 비워야 해.

그래야 다시 다른 걸 삼킬 수 있는 힘이 생겨.


엄마도 이런 적 있었어?

그럼. 엄마도 가끔 배가 아팠어.

엄마도 엄마한테 '엄마 나 배가 아파' 그랬지.

그러면 엄마의 엄마도 흰죽을 끓이고.

후후 식혀서 엄마 입에 넣어주었어. 

엄마도, 엄마의 엄마도 그랬어.


그러면 흰죽은 약이야?

맞아. 어떨 땐 흰죽만이 아픈 배를 낫게 해.

사랑으로 끓여낸 흰죽만이.


하지만 흰죽만 먹어도 배가 아플 때는 어떻게 해야 해?

그럴 땐 이리와. 엄마 옆에 누워봐. 엄마가 배를 만져줄게.

배야 배야 아프지 마라. 배야 배야 아프지 마라.

그러는 동안 너는 잠이 드는 거야.

냄비 속에서 폭폭 끓고 있는 흰죽을 생각하면서

흰죽같이 몽글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거야.

그러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야. 분명히.



예쁜 내 딸. 엄마없이 살 수 있는 곳까지 가도

아프면 언제든 얘기해. '엄마 나 배가 아파.'

그러면 엄마는 흰죽을 끓여놓고 너를 기다릴.

우리아기 따뜻한 흰죽 한술 떠먹

아프지마라 아프지마라 잠들 때까지 곁에서 어루만져 게.


다음날 네가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나를 떠나가면

엄마는 더할 나위없이 기쁠 거야.

정말로  마음으로 한잠을 잘 거야.


엄마는 오늘도 흰죽을 끓이며 기도해.

우리딸 얼른 낫게 해주세요. 이제 그만 아프게 해주세요.

그리고 생각단다.

엄마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와, 나를 엄마로 만들어준 너를.

오늘보다 나아질 일의 우리를.


 




(딸 둘이 나란히 장염에 걸려 며칠동안 흰죽만 끓였다. 큰애는 어릴 적에 급성장염으로 탈수가 와서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거의 의식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이 무서웠다. 그래서 지금도 장염이 무섭다.

아이들이 아플 때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다. 그냥 아프지만 말라고, 오직 그것만 바라게 된다. 얼른 낫게 해주세요, 이제 그만 아프게 해주세요,  어딘지도 모르는 데에다 그리도 간절히 빌게 된다. 겨우 장염에도 이런다.

 다행히 이제 나은 같다. 나도 이제 것 같다. 내일의 나는 '제발 쟤네들이 일찍 자게 해주세요, 제발 저것들이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빌게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은 진심이다. 아이들이 커도, 아플 땐 징징대며 찾아와 실컷 어리광부리고 편히 한 숨 자고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너무 아플 일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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