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안 사지는 것들이 있다. 내게 있어 그 대표적인 것은 수건과 속옷이다. 매일 입고 벗고 매일 빨아대면서도, 빨래를 갤 때마다 낡았다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새로 살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아마도 비공개적인 곳에서 사용하는 것인데다 이미 길들여진 것의 편안함이 한 몫 하는 듯 하다.
장마철. 잘 마르지 않는 빨래에 대한 짜증과, 낡아빠진 것에 대한 지겨움, 꿉꿉함이 가시지 않는 마음을 핑계로 새 수건과 새 속옷을 장바구니 가득 담아놓고 이 글을 쓴다.
수건
우리집에는 진짜 오래된 수건이 몇 장 있다. 모두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인데, 그래도 어디서 났는지는 수건마다 새겨진 문구을 보면 알 수 있다. '축 개업'부터 oo이 첫 돌, oo여사님 칠순, oo회사 창립기념, oo봉사회, oo 체육대회, oo산악회 등반기념, o학교o회 동창회 등등...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수건 선물이 여기저기서 참 많이도 들어왔었다. 저마다 이유는 달라도 다같이 기념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으레 수건을 찍어돌리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엄마 방 서랍장 깊숙한 곳에 늘 새 수건이 어느정도 쌓여 있었는데, 신혼 초에 시어머니께서도 안방의 장롱 깊숙이 손을 넣어 색색깔 새 수건을 한가득 꺼내주셨다. 익숙하고도 정감가는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내게로 온 수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룩이 생기고 색이 바랬다. 빨아도 삶아도 처음의 색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것은 끝부분이 풀어지고 어떤 것은 가운데가 해져 구멍이 났다. 손과 얼굴을 닦던 것이 발닦는 용도가 되고, 주방 싱크대 밑에도 있다가 걸레도 되었다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버려졌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과정이었고 특별한 감정도 없었으나, 한 며칠은 습관처럼 그 낡은 수건을 찾곤 했다.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왔든 언제 어떻게 끝이 나든,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와 날짜를 명확하게 새긴 채 오랜 세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수건의 모습은 아마 웬만한 사람보다 낫지 싶다.
속옷
속옷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신의 내적, 외적 성장을 가장 은밀한 곳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매개체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속옷이 말 그대로 '속(에 입는)옷' 이외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나는 더이상 자라지 않고 은밀할 것도 없다. 대부분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날들이고, 때때로 늙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다.
속옷에 대한 글 이라고 하면 오규원의 시 <죽고 난 뒤의 팬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Km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
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나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한다. 나도 가끔 갑작스레 죽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그때마다 낡아빠진 팬티나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 냉장고에서 썪어가는 감자 한 알, 미처 버리지 못한 일기장, 이런 것들이 먼저 생각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제는 의외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고 난 뒤 남겨진 브래지어와 팬티를 받아들고 '이런 걸 입고 살았다니 그렇게도 돈이 없었니' 하며 슬퍼할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내가 그렇게 지질해 보일 수가 없다. 버리지 못한 썪은 감자나 일기장을 보고 '이것이 냉장고 제때 정리하라니까 드럽게도 해놨네. 어머나 내 욕을 많이도 써놨구만' 하며 인상을 쓰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 안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아무튼. 속옷은 수건보다 좀 더 말하기가 예민한 놈이다. 새 속옷은 새 신발과 비슷해서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쁘고 귀여운 새 속옷, 그 날의 분위기에 맞는 속옷을 고르며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는 속옷이 속옷이면서 동시에 겉옷의 기능도 일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술마시다 살짝 드러날 브래지어의 어깨끈이라던가, 뜨겁게 사랑에 빠진 이상 언제 어디서 벗어던져 질 지 모르는 옷들에 대해 늘 어느정도 대비를 하고 살았달까. 애 둘을 챙기며 하도 정신없이 살다보니 '그땐 내 몸 하나만 챙기면 됐지'라고 수월하게 생각할 때가 많지만 생각해보면 그 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겉옷부터 속옷까지, 그 나름대로 신경쓸 일이 많았다.
지금은 그저 얼른 집에 가서 이 숨막히는 끈이나 좀 풀어버렸으면 좋겠고 저것들 얼른 재우고 빨리 샤워하고 새(새 것X, 빨아놓은) 팬티로 갈아입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하다. 오랫동안 입어 내 몸에 딱 맞게 늘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도 불편함보다는 자유, 자유, 안팎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이유일 테다.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 나는 왜 탈코르셋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고도, 노브라를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동참하지 못할까. 왜 이슬아같이 톡 튀어나온 젖꼭지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지 못할까. 아 이슬아 같이 당당하고 글 잘쓰고 멋있는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결론이 매우 이상하게 났지만) 아무튼 내일, 아니 오늘은 월급날이니 반드시 꼭 장바구니에 담긴 팬티와 브래지어와 수건을 결제하고 말 것이다. 이번만큼은 세제나 물티슈나 각종 식재료, 자잘한 애들 물건에 우선순위를 밀리지 않을 거다. 수건도 속옷도 그 촉감과 조임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분명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리고 헌 것들, 이정도면 아주 마르고 닳도록 썼다고 할 수 있는 헌 것들은 미련없이 버릴 것이다. 이게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인가 싶지만 사는 게 그렇더라. 보면 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사람을 살게 하고 죽게 하고 비장하게 하고 글쓰게 하고 그렇더라.
자, 보자. 삶에서 수건과 속옷같은 존재가 또 뭐가 있는지.
이 정도면 이제 버리고 새로 들여야 할 것이 또 뭐가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