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쓴다. 쓸 것은 별로 없는데 쓰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다. 쓰고 싶은 마음... 하고 싶은 말...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구멍 바로 밑에서 찰랑대는 뭔가가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것 같다. 다들 그런 걸 몸이나 마음 어딘가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 같다. 매일같이 뛰는 사람은 발목 언저리에, 매일같이 쓰는 사람은 손톱 아래에, 매일같이 웃는 사람은 둥근 뺨 어딘가에. 넘쳐봐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넘칠까봐 조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애처롭고 귀엽다.
아, 귀여운 나의 열살난 딸이 연애를 한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나 너 좋아"라고 고백을 했는데, "나도"라는 답장이 왔단다. 그 문자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방방 뛰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모쏠탈출?" 하며 놀라는 척을 했다. 딸은 웃으며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엄마, 조용히 해!"
나는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딸이 먼저 고백했다는 사실이 좋다. 아무리 열살이래도 제딴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엄마는 40년동안 한번도 못해본 일을 용감하게 해낸 딸이 그저 멋지다.
딸에게서 전해듣는 열살의 연애는 정말 깜찍하다.
"엄마, 오늘은 학원가는데 oo이가 따라와서 같이 갔어." "진짜? 어디까지?" "교문까지"
"엄마, 오늘 oo이가 점심시간에 도서실에 왔어. 걔 맨날 점심시간에 운동장 나가거나 복도에서 노는데 처음으로 도서실에 온 거야. 그리고 내가 흔한남매 8권을 빌렸는데 걔가 바로 9권을 빌렸어!"
"엄마, 아까 oo이가 선생님 심부름하고 젤리를 두 개 받았는데 애들 몰래 내 사물함에 한 개 넣어줬어. 애들한테 들킬까봐 나도 학원가는 길에 혼자 있을 때 먹었어. 나도 내일 과자 하나 줘도 돼?"
그러면서 말했다.
"엄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말이었다.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요즘 큰딸을 보면 이렇게 아이들과 붙어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이 든다. 친구랑 같이 갈테니 학원 앞에도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하고, 얼마전 주말엔 친구랑 둘이 수영장에도 다녀왔다. 어설프긴 하지만 샤워도 혼자 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는 것까지 자기 손으로 한다. 불과 몇 달 전, 고개숙여 머리감는 법을 알려줬을 때 눈따갑다고 울며불며 짜증내던 아이는 이제 없다.
앞으로는 이제 없는 아이, 내 기억속에만 있는 아이가 점점 많아질테고, 내가 모르는 아이의 하루가 점점 길어지겠지. 오래전에 읽었던 도리스 레싱의 짧은 소설이 생각난다. '동굴을 지나서'였던가 '동굴을 찾아서' 였던가. 아무튼 나와 내 딸도 책에 나오는 엄마와 소년처럼 점점 멀어지면서, 그러나 계속해서 서로를 의식하면서, 치열하게 자기만의 삶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아이를 짐처럼 끌어안고 사는 내가 되지 않기를.
무사히 잘 멀어질 수 있기를.
훌쩍 커버린 딸의 뒤에 서서. 자주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