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팬처럼
주방용품의 세계는 끝이 없다. 크고 작은 주방가전은 물론 조리도구, 식기류, 세제나 수납 관련 용품까지 따진다면 여기야말로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가격도 천 원짜리부터 수십,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까지 같은 분야에서 이 정도로 갭이 클 수가 있나 싶은 곳이 바로 주방살림이다.
자취생활 때는 차치하고, 주부로 살기 시작하며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은 냉장고, 그다음은 가스레인지, 인덕션, 에어프라이어 등의 열원이다. 결혼 초에는 가스레인지를 사용했는데, 남편이 가스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인덕션으로 바꾸자고 했다. 나는 이런 분야에 무딘 편이라,
“다들 이 정도는 먹고사는 거지, 괜찮아.”
라고 했는데, 아이에게도 나쁠 거라는 남편의 말에 홀랑 넘어갔고 그렇게 우리 집에는 인덕션이라는 신문물이 등장했다.
인덕션이란 녀석은 꽤나 까다로워서 냄비도, 프라이팬도, 주전자도 모두 가린다. 그렇기에 ‘인덕션 사용 가능’ 혹은 ‘IH’가 붙은 조리기구를 사용해야만 했다. 당연히 가스레인지용 제품들보다 모두 비쌌기에 당시 우리 집에는 인덕션용 조리도구가 없었다. 급한 대로 프라이팬과 20cm 국, 찌개용 냄비 하나를 샀다. 이왕 돈 더 주고 사는 거니 통 3중 스텐냄비, 스텐 프라이팬으로 샀다. 일단 인덕션용 도구를 사용하니 물도 빨리 끓고 가스냄새도 안 나는 게 좋았다.
문제는 프라이팬이었다. 스텐프라이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반짝이고 깔끔하며 인덕션에 사용가능하다는 것만 보고 덥석 사 들인 게 문제였다. 뭐 하나 하려면 오만곳에 다 들러붙었고, 프라이팬을 거친 모든 식재료는 폐차장을 거친 것처럼 결말이 너덜너덜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유튜브를 많이 보던 때도 아니므로 살림책과 블로그를 찾아가며 스텐팬을 사용했다. 스텐팬의 핵심은 ‘예열’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대체 얼마나 해야 하며 얼만큼의 기름을 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열이 되면 프라이팬에 물방울이 구슬처럼 굴러간다고도 하고, 기름이 지글지글 퍼지는 모양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가뜩이나 바쁜 식사 준비시간에 프라이팬만 쳐다보며 4분 남짓을 보내고 준비된 프라이팬을 써도 어느 날은 여전히 눌어붙었다. 그래도 비싸게 주고 샀으니 어떻게든 인내심을 갖고 적응해 보려 노력하던 어느 날, 계란후라이를 해 먹겠다던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프라이팬이 왜 이래?”
“그치? 그냥 코팅팬 써야겠다.”
그렇게 스탠팬은 싱크대 구석장으로 들어갔고, 그 후 이사를 하며 버려졌는지 어쨌는지 자취를 감췄다. 차라리 12000원짜리 코팅팬을 소모품처럼 쓰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겠다는 결론을 낸 후 몇 년간 코팅팬을 사용했다.
얼마 전, 우리 집 주방에는 24cm 스텐팬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자꾸 금방 벗겨지는 코팅팬을 참을 수 없어 내린 조치였다. 그동안 쌓인 주부 짬밥이 있으니 이번엔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스텐팬은 시작부터 까다롭다. 연마제 제거를 하느라 기름과 베이킹소다, 주방세제로 몇 차례나 닦아내니 벌써부터 괜히 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반짝이는 스텐팬을 보니 일단 기분은 좋았다.
팬을 올리고 인덕션을 6단으로 켰다. 어느 정도 열감이 돌 때 4로 낮추고 기름을 둘렀다. 그 기름이 자글자글한 작은 갈래로 나뉠 즈음 음식을 넣으니 하나도 들러붙지 않았다. 계란도, 두부도, 어묵도 모두 잘 익으니 무언가 해낸 것만 같아 뿌듯할 지경이었다. 기분 좋게 음식을 하고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팬에 뭍은 기름이 때처럼 눌어 잘 닦이지 않았다.
‘이건 뭐 퀘스트가 끝이 없구먼.‘
물을 넣어 끓인 후 닦으니 말끔히 닦였다.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스텐팬은 아직 온기가 있을 때 얼른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코팅팬은 완전히 식은 후에 세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늘 프라이팬 설거지는 가장 마지막이었는데 스텐팬은 그 반대인가 보다.
음식을 할 때는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하지만 조리가 끝난 다음에는 부지런히 마무리를 해야 한다.
나는 대부분의 일을 시작할 때 성급하게 일단 저질렀다가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이어리, 운동, 청소 등등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배운 것이 있다면 차분히 생각하고 여유 있게 시작하며 귀찮은 일일수록 빠르고 깔끔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스텐팬을 사용하는 것처럼.
아직 미숙하지만, 언젠가 스텐팬을 편하게 사용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도 그만큼 성장해 있으려나? 적어도 지금보단 좀 더 어른스러워져 있겠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