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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까멜리아 Oct 29. 2024

빛과 소금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


집안일 3대 이모님 중 우리 집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는 분이 계시니 바로 식기세척기. 식세기 이모님 되시겠다. 참고로 집안일 3대 이모님은 식기세척기, 건조기, 로봇청소기가 꼽히고 이 중 우리 집에는 식세기와 건조기가 있다.


식기세척기 이모님을 집에 모신 지는 7~8년쯤 됐다.(너무 고마워서 그러니 종종 극존칭이 등장하더라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결혼생활이 현재 12년째이니, 주부생활의 6할을 함께한 나의 주방 동지라 할 수 있겠다.


처음 들인 식세기는 6인용이었다. 당시엔 3인가족이었고, 4인가족은 계획에 없던 시절이었기에 6인용도 커 보였다. 처음 식기세척기를 사용했던 날, 손 설거지만 하다가 갑자기 등장한 신문물의 기능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대충 헹궈 착착 쌓고 세제 넣고 문 닫고 버튼 몇 개만 눌러주면 따끈한 김 폴폴 풍기며 뽀득하게 닦인 식기를 내어주니 하기 싫던 설거지가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사용 권장기간이 5년이던 첫 식세기 이모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6년 반을 썼다. 어느 날 세척 중이던 식세기가 ‘펑’ 하는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멈춰버렸다. 그동안 너무 혹사시켜 그런가 입을 굳게 닫아 열리지도 않았다. 급한 대로 AS센터에 전화를 했고 시키는 대로 하자 문은 열렸는데 어쩐지 한번 전문가가 봐줘야 할 것만 같았다. 기사님이 오셨고, 덤덤하게 나의 식세기 이모님의 영업종료를 선고하셨다.


‘이게 진짜일리 없어.’


둘째가 아직 어릴 때라, 크고 작은 설거지감도 많던 시기였는데… 어쩔 수 없이 다시 손 설거지를 시작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싱크대 한 켠, 식세기 이모님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다 얼마 뒤, 우리 집에 더 큰 식세기 이모님을 모셨다. 남편 회사 복지 포인트에 돈을 보태 모신 풍채 좋은 이모님은 푸른빛이었다. 복지몰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으나 컬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흰 주방 장들 사이에 끼워진 청색 식기세척기는 여러 의미로 존재감이 남달랐다. 설치해 주신 기사님이 사용법을 빠르게 알려주셨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네’ 혹은 ‘아~ 그렇구나.’ 이렇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 남은 건 단 두 가지였다.

켜면 기본적으로 세팅된 표준모드에서 고온건조는 빼고 돌리면 55분 컷이라는 것과 가끔 식세기 바닥에 붙은 뚜껑을 열고 소금을 1kg씩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식기세척기가 설치된 날 저녁, 저녁 먹은 설거짓 감을 모두 넣고 온 가족이 식기세척기 앞에 모여 시연회 하듯 첫 가동을 했다. 지난번 6인용 식세기처럼 작은 창이 있으면 좋으련만 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라 귀를 쫑긋 하고 안에서 들리는 물소리만 듣고도 모두가 신기해했다. 1시간여 후 ’띵띵 띠리 리리!‘ 소리를 내며 문이 5센티쯤 툭 하고 열렸고 그 안에서 따뜻한 수증기가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우와~. “하고 달려들어 그릇을 확인해 보니 역시 뽀득하게 잘 닦였다. 현대문명 만만세다.


큰 식기세척기가 생긴 다음부터 매우 편해질 줄 알았지만, 설거지거리가 아주 많지 않으면 전기세 이슈로 웬만하면 손 설거지 하는 날이 늘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식세기에 햇빛모양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햇빛모양 경고등의 의미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 뒤였다. 시간이 더 지나고 급기야 식세기가 멈췄다. 그제야 ‘이거 불 들어오면 소금을 넣으라고 했던가……’ 싶었다. 바로 쿠팡을 켜 한주소금을 주문했다. 다음날 바로 받아 떨리는 맘으로 바닥 뚜껑을 열고 소금을 붓기 시작했다.

처음엔 깔때기를 꽂고 그 위에 소금을 부어봤으나, 아래 물이 찰방찰방 차 있다 보니 중간 소금이 축축하게 젖으며 녹기 전에 깔때기 구멍을 막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깔때기 구멍을 나무젓가락으로 쿡쿡 눌러도 봤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결국 깔때기를 빼고 어정쩡한 자세로 왼쪽으로 몸을 많이 굽혀 소금을 넣으려니 옆구리에 담이 올 것 같았다. 1kg 소금 한 봉지를 다 넣으라던 기사님의 말을 떠올리며 인내심을 갖고 계속 부었다. 드디어 소금봉지가 텅 비고, 뚜껑을 닫고, 급속모드로 한 번 돌렸다.


된다. 그것도 아주 잘 된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정말 원인이 소금이 없어서 그런 거야?”


라며 황당해했다. 어찌 됐건 내게 빛과 같은 식세기 이모님은 소금 1kg을 드시고 살아나셨다. 다시 생각해도 가전이 소금을 먹고 재가동된다는 게 이상하긴 하다. 원리를 안다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으나 그런 거 모르는 내 입장에서는 정말 의외의 곳에서 해결책을 찾은 셈이었다. 어쩌면 내가 마주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도 해결책은 정말 엉뚱하리만큼 의외의 곳에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 빛과 같은 식세기 이모님이 소금으로 벌떡 일어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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