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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까멜리아 Oct 29. 2024

13분의 늪

허용한도 초과 금지


여러 집안일 중 가장 손이 덜 가는, 비교적 수월한 종목은 단연 세탁기 돌리기다. 빨래통에 담긴 세탁물을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 문 닫고 세제 넣고 표준모드로 돌리기까지 버튼 몇 개만 눌러주면 끝이니 그렇게 몸이 편할 수가 없다.

편한 몸과 달리 세탁기를 돌리는 마음은 불편하다. 시작과 동시에 마감일을 받아 둔 심정이랄까? 세탁물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가 지나면 빨래가 다 될 것이고, 탈수를 했어도 무거운, 물에 젖은 빨랫감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당까지 나가 널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인가족인 우리 집 빨래 담당은 당연히 주부인 나다. 이틀에 한 번 세탁기를 돌리니 한 달이면 열다섯 번쯤 세탁기를 돌리고 마당에 빨래를 넌다. 가끔 주말에 남편이 널어주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달에 다섯 번이 채 되지 않는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 등교, 등원하는 아이들의 한 번 입은 옷은 모두 빨래통으로 들어오는데 찬 바람이 나고 옷이 부피가 커지며 빨랫감이 갑자기 폭증해 버렸다.

이틀에 한 번 잔뜩 쌓인 빨랫감을 세탁기에 욱여넣노라면


‘과연 세탁이 되는 것인가?’

‘물 뭍혔다가 말리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매일 세탁기를 돌릴 만큼의 파이팅이 내겐 없다.


나는 보통 아침에 아이들 라이딩 가기 전 세탁기를 돌려두고 돌아와 널어두는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 세탁기 남은 시간을 보니 13분이 찍혀 있었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도 한 잔 마시다가 세탁기가 계속 돌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랴부랴 세탁기 앞으로 가 시간을 확인해 보니 13분.


‘아까도 13분이었는데…’


숫자가 줄어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탁기 앞에 망부석처럼 서서 숫자창을 노려봤으나 눈치 없는 세탁기는 계속 13분만 띄웠다.


‘이런 13무새같으니라고!’


‘세탁기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며 서비스센터에 AS접수를 했다. 방문예약이 밀려 있어 사흘 뒤에나 기사님 방문이 가능하단다.


‘사흘간 빨래는 어쩌지? 아니, 지금 당장 세탁기 속에 든 덜 짜진 빨래들은 다 어쩌지…‘


근처 빨래방이 퍼뜩 떠올랐지만 물에 젖은 빨랫감을 가져가 세탁하고 건조해 올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일단 세탁기 문을 열었다. 빨랫감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센서 오류가 났을 수 있으니 빨랫감을 조금 분산시켜 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짱구를 좀 굴려봤다. 세탁물 반을 꺼내고 다시 세탁기 문을 닫았다. 위에 연결된 건조기도 문을 다시 단단히 닫았다. 그리고 다시 헹굼과 탈수를 시도했다.


헹굼 1회,

탈수 강 모드

시작,

남은 시간 13분.


이게 뭐라고… 그 앞에 서서 긴장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12로 숫자가 바뀌었고 “그롸치!” 하는 연식 있는 환호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탈수는 무사히 마쳤고 아까 꺼내 둔 빨랫감 절반을 다시 넣고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냥 너무 많아서 그런 거였구나!’


얼른 AS접수를 취소하고 생각해 보니 안도가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결국 빨래를 매일 해야만 하는 건가?’


라는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내 집안일 중 세탁의 마지노선은 이틀에 한 번이다. 빨래가 건조될 시간도 필요하거니와 집안일이 세탁 하나뿐이라면 하루에 서너 번도 돌리겠지만, 그 외에도 할 일이 많기에 자연스레 정해진 마지노선이다.

세탁기도 용량이 많으면 1시간 반을 돌리고도 13분 남기고 못한다고 보이콧하는데,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오버페이스는 안 될 일이다. 나도 그건 양보 못해! 하며 세탁기와 되도 않을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빨랫감을 줄일 방법을 찾기로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살림도, 육아도, 개인적인 일도 모두 그렇게 해내며 지냈다. 그러다 한 번씩 과부하가 생기면 몸 이곳저곳에서 보이콧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렇게 되니 모든 게 올 스톱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꾸준히 지속하는 게 중요한 육아와 살림에 있어서 이런 상황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굵고 짧게! 가 어딘가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건 가늘고 길게!라고 느낀 다음부터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내가 가진 에너지의 일부만 쓰려 노력한다.


허용한도 초과는 안되니까! 세탁기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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