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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딜라 Nov 14. 2023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시 [간肝]에 대하여

코끝이 얼얼해지는 온도, 표지 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쓰고 나니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고뇌로 힘겨웠던 대학생활이 한 권의 시집으로 완성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출판하기 전, 최종확인을 받고 싶어 이영하교수님의 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아요, 시집 출판을 잠시 미루는 게 좋겠어요.


추-락.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피드백.

방으로 돌아오는 걸음걸음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기어코 설득해서 문과에 들어온 순간부터 3년 반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그러나 동주는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펜을 듭니다. 어렵게 빠져나온 터널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더 이상은 초라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들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1941. 11. 29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로 시작해요. 이 시에서 자신을 별주부전의 토끼로 묘사합니다. 바닷속에서 죽다 살아 나온 토끼마음,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깊고 차가운 세상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깨달음'의 육지에 닿게 된 토끼는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간肝은 '사람의 속마음, 진심'을 상징해요. 동주는 시 [간]을 통해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을 거예요.


#습한 간

겁쟁이로 보이면 어쩌나 걱정하며 진땀 뺐던 마음, 그동안 습해진 간. 그렇다 할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제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습한 간을 꺼내 햇빛에 말리기로 하죠. 본의 아니게 구겨놓은 진짜 속마음, 품위 있게 꺼내 햇빛이 반사되어 따스한 바위 위에 탈탈 털고 곱게 펴서 말리웁니다.


'우리'라는 세상의 경계를 넓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고


YOU1: 간을 그의 속마음으로 이해했군요.


네, 이 부분이 [별 헤는 밤], [서시]의 감성과 맥락을 같이해요.


YOU2 : 습한 저의 간도 꺼내 말리고 싶어 지네요!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묘한 후련함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나 많이 흔들렸을 거예요. 민족의 영웅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으며 살고 싶은 유혹. 그래서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동주.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YOU2: 프로메테우스는 누구예요?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푸스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티탄족에 속하는 신이에요. 이것 때문에 고민했어요. 그런데 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를 등장시킨 것일까?


프로메테우스(그리스어 : Προμηθεΰς, 영어 : Prometheus)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라는 뜻이다.

'먼저 보는/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접두사인 'Pro-(먼저, 앞서)'는 다른 단어에도 많이 쓰인다. 프롤로그(prologue)나, 예언자란 뜻의 prophet 등. 즉 최초, 처음이라는 의미에는 다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예언자(預言者, prophet)는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이다.

Prophet의 원어인 그리스어 Prophetes는 '누군가를 위해 말하는 사람', '대변자', '옹호자'  
(advocate, speaker, spokesperson) (출처 :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이 하나가 있어요. 1826년 영국의 존 워커에 의해 최초로 발명된 마찰성냥. 그 무렵 런던에서 새뮤얼존스 이 발명한 성냥을 '프로메테우스'라고 불렀어요.

프로메테우스 성냥 [sciencemuseumgroup.org.uk]


당대의 위대한 발명품 '성냥'.

이 독특한 발명품에 '선지자,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이름을 붙인 건데요. 이 그림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성냥이름 하나 멋지게 잘 지었다 싶더라고요. ^^

빛은 어둠에 반대되죠. 흥미롭게도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를 뜻하는 영어단어 luminary에 선각자라는 뜻도 있죠.

선각자 : 남보다 먼저 사물이나 세상일을 깨달은 사람


성경으로 교육받아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에 익숙했고, 빛의 근원이라고 믿는 분을 유념하며 자라왔을 거예요. 또 자신은 어떤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할지 늘 고민했겠죠. 그런 동주에게 프로메테우스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던 동주


어떤 순간에도 빛나는 동주의 아이덴티티는 진실함. 그의 시는 솔직합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코카서스 산 정상에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낮동안 쪼아 먹혔던 간은 밤이 되면 다시 재생합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프로메테우스의 일상. 힘들었던 하루의 끝에 동주도 너덜한 마음을 또다시 다잡아 봅니다.


산 절벽에서 추락해 푸른 바닷속으로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고통의 끝을 향해.




제가 보는 [간] 은 이런 느낌이에요!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이 [서시] 라면, 그의 대학생활의 결문은 [간] 이 아닐까요? 진심을 담아!


불쌍한 선각자


어두운 세상에 발광체 역할을 하는 선각자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더구나 시대가 환영하는 선각자는 더 드물죠. 그러나 그들은 어느 때나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하죠. 먼저 깨달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든 말을 해요. 동주는 시로 말을 했죠. 그 방식이 시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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