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의 일기
내가 코로나에 확진된 날은 내 서른 두 번째 생일날이었다. 생일을 앞둔 밤 나는 평소답지 않게 앓았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코로나 양성 반응이니 PCR 검사를 받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검사를 받고 서둘러 집에 돌아와 그날부터 일주일을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살았다. 가족들은 조금 안쓰러워 했고 내 생일을 아는 몇몇 친구는 기프티콘을 보내줬다. 그들이 보내준 기프티콘으로 나는 일주일을 풍족하게 살았다.
일주일 자가격리 기간 동안 나는 모든 물건을 인터넷 쇼핑으로 해결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더욱 딱히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장을 보면 다음 날 도착했고, 급한 일이 있으면 바로 배달되는 장보기 어플을 사용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알콜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보고싶은 사람들과는 영상 통화를 이용했다. 원한다면 정말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시대였다. 이런 시대가 진작 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더욱 와 닿았다. 홀로 지내며 나는 생각했다. 아주 원론적이고 기초적인 질문. 이런 최첨단 시대에 나는 왜 인문학을 공부할까, 이 시대에 인문학의 쓸모란 무엇일까?
인문학이 중요하다, 인문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말은 워낙 유명하다. 다수가 인문학이 뭔지는 몰라도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건 안다. (나도 인문학을 공부하지만 아직 인문학이 뭔지 모르겠다.) 문제는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이 외침이 어째 현실과 동떨어진, 딱딱하고 지루한 교과서 속 외침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왜 인문학은 고루하고 철 지난 라디오처럼 느껴질까.
인터넷에 떠도는 철학과에 합격한 고3 수험생의 원서를 본 적이 있다. 수험생은 철학과에 지원한 동기를 묻는 질문에 <멋쟁이 토마토> 노래를 인용하여 이런 답을 했다. 통통 튀는 매력적인 대답은 이렇다.
인문학은 '왜(why)?'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다. 주스와 케첩이 될 거라는 첫째 둘째 토마토 말에 "왜? 나는 춤을 추고 싶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인문학은 그 사고력을 키워준다. 더 나아가 "나는 왜 춤이 좋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춤 말고 좋아하는 다른 건 없을까? 나에게 춤과 노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민하게 하는 것. 그 '왜(why)?'가 인문학의 핵심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질문은 나를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되도록 피하고 싶은 과거를 직면하기도 하고 인정하기 싫은 못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사는 게 벅찬 사람들에게 이런 과정이 반가울 리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 아무 걱정없이 가벼운 콘텐츠를 접하고 싶어 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실컷 일하고 밤에 "왜 나는 어쩌구 저쩌구~?" 같은 질문을 하고 싶지 않다. 이게 인문학이 세상과 멀어지는 이유다.
내가 어릴 적에는 어딘가 사연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있기였다. 웃고 있지만 살짝 그늘지고 마음 속에 남들은 모르는 아픔을 간직한 그런 사람. 왜 그렇게 많은 드라마 속 재벌들이 출생의 비밀을 간직했겠는가, 겉과 속이 다른 그 모습. 그게 먹혔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르다. 요즘 사람들은 구김살 없이 자란 주인공을 좋아한다. 부잣집에서 사랑만 받고 자라서 인생 쓴 맛 따위 겪어본 적 없고 궁금하지 않은 느낌. 힘든 일이 있어도 가볍게 툭툭 털어버리는 자존감 높은 쿨-한 캐릭터가 인기다. 유방암에 걸려도 슬퍼하기 보다 가슴 재건 수술 사이즈를 고민하는 <술꾼 도시 여자들> 속 한지연(한선화 역)이 딱 그렇다. 무한 긍정 마인드 그녀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성찰하라고 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 "술이나 마셔요~" 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더욱, 이 시대에 인문학의 쓸모를 고민하게 된다. 과학은 발달하고 사람들은 쿨해지는데 인문학은 그 성질과 정반대에 서 있으니. 인문학이 재미있을 수 있을까? 머리 아프지 않게 복잡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32살 생일에 뜬금없이 나를 찾아 온 인문학은 나에게 큰 숙제를 내고 갔다. 쿨하고 싶지만 태생이 구질구질한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곱씹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