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이야기란 뭘까? 본격적으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항상 궁금했던 내용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받고 또 나 스스로도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정작 ‘재밌다’라는 게 뭔지 모르겠는 거다. 혼자 곰곰이 생각도 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하며 재밌는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재미라는 게 워낙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이기 때문에. 이건 ‘재밌다’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속성과 특징에 관한 것이다. 당장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당신이 재밌게 본 영화나 드라마는 무엇인가요?” 그럼 아마 각자 다른 영화를 꼽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영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간 아까운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재미란 주관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막연하게 ‘재밌는 이야기’라고 하면 구체적인 답이 나오기 어렵다.
둘째, 게임으로 사용자에게 줄 수 있는 재미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이건 재미를 전달하는 매체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느냐에 따라 재미는 달라진다. 영화‧드라마‧게임‧뮤지컬‧연극‧광고 등 각각의 매체에는 고유의 특성이 있고, 사용자가 매체를 접하며 기대하는 재미도 다르다. 하나의 매체 안에서 전달할 수 있는 재미 또한 천차만별이다. 게임을 예로 들자면 화려한 그래픽에 집중하여 사용자의 시각적 재미를 충족시킬 수도 있고, 캐릭터 스킬이나 움직임을 다양하게 하여 조작하는 재미를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재미 요소에 집중할 것인지 보다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둘 중에서 나를 괴롭혔던 건 첫 번째 이유였다. 워낙 게임을 많이 안 해보기도 했고, 전공도 구비문학이기에 처음부터 게임의 재미보다 이야기의 재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의 기술적 재미까지 추구하기에는 여유가 없던 거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 질문은 한 문장으로 요약됐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재미를 어떻게 객관화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던 중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탄생>이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현장에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사람, 쉽게 말해 작가를 위한 책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고른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구비문학을 전공하면서 내가 접한 스토리(서사)에 관한 책만 수십 권이다. 연구를 목적으로 고른 책이었기에 대부분 태초부터 인간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왜 즐기며, 이야기를 창작하고 즐기면서 발생하는 효과 등을 설명하는 책이었다. 논문을 쓰거나 강의용으로 참고하기에는 적합했지만 창작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실무자의 경험이 녹아 있으면서 창작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책이 필요했다.
책의 저자 김태원씨는 드라마 제작 명장으로 불린다. 실제로 그가 제작에 참여했던 작품을 보면 명장 소리가 나온다. <올인> <불새> <주몽> <황진이> <선덕여왕> 등, 30대 초반인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었던 국민 드라마가 빼곡하다.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인데 시나리오 작가가 아닌 제작자가 저자인 게 다소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지나치게 자기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객관적인 눈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달까. 다수를 만족시키는 보편적인 재미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책을 고를 때 가졌던 질문에 부합하는 책이었다.
내 나름대로 책을 요약해보자면 이 책에서 강조하는 바는 결핍과 욕망을 축으로 하는 플롯, 로그라인, 캐릭터다. 이야기의 중심에 주인공의 현재 결핍과 그로 인해 추구하는 욕망이 있어야 많은 사람들을 매혹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거다.
특히 내가 궁금했던 부분, 이야기의 재미에 관한 그의 설명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이야기의 재미를 기능적 재미와 가치적 재미로 나눈다. 기능적 재미는 앞서 설명한 두 번째 재미에 해당한다. 장르적인 특징인 셈이다. 로맨스/유머/액션/미스터리 등 장르에 따라 갖춰야 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재미. 예를 들어 로맨스 영화면 주인공의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치적 재미는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재미를 뜻하는데, 기능적 재미가 양념이라면 가치적 재미는 핵심이다. 가치적 재미란 “나와 비슷한 결핍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에 공감하는 데에서 출발해 그의 행동(욕망)에 동의하고, ‘만약 내가 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치적 재미”라 정의하는데, 결핍과 욕망의 기본축이 아주 뚜렷하다.
개인적으로 결핍과 욕망을 축으로 설명하는 재미가 쉽게 이해됐는데, 보통 내가 설화를 분석해가는 과정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했던 설화 분석이 쌓여있는 블록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는 과정이었다면, 이야기 창작이란 가운데 의미를 놓고 그 주위에 블록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느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작업을 반대로 하면 됐던 것이다. (물론 그게 가장 어렵지만....ㅋㅋ)
재미와 함께 가장 도움이 됐던 부분은 저자가 만든 플롯 구성인 <욕망의 레시피>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할리우드 여러 스토리텔링 이론을 소개하고, 자신이 만든 플롯 구성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욕망의 레시피>다. 전체 24개의 세부 구조로 이루어진 플롯이며, 24개 부분마다 진행되어야 하는 외적 사건과 그에 따른 주인공의 정서를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예를 들어 특정 시기 주인공이 가져야 할 감정을 “그래, 한번 해보자!”, “하필 왜 내게 이런 일이!” 등으로 아주 자세히 풀어 놓았는데, 그런 점이 초보 창작자로서 참고하기 참 좋았다.
실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머리로만 구상했던 아이디어를 풀어낼 수 있었다. 주인공과 적대자 설정, 전체 플롯 구상이나 스토리를 매력적으로 요약하는 네 줄 로그라인 작성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고, 분명 시나리오를 쓰며 바뀌겠지만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에 큰 뿌듯함을 느낀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초반에 가졌던 질문,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재미를 어떻게 객관화할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어떤 캐릭터와 주제를 끌고 갈 것인가는 내 몫이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내가 관심 가지고 좋아하는 것들, 내 취향이 담긴 주제가 될 것이다. 내 속에서 끌어낸 이야기이기에 내 취향이 담기는 건 당연하다. 중요한 건 내 취향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것인가이다. 이 책의 저자가 24개의 구조로 세분화 된 플롯을 만든 것도 설득력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면 그게 바로 객관성이다.
초보들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갈까부터 어려워하니, 탄탄하고 촘촘한 구조를 따라 재미를 추구하며 설득력을 획득해보라는 거다. 그걸 연습하다 보면 자신만의 템포를 만들 수 있을 테니. 만약 나처럼 초보 창작가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의 도움을 받아보시길. 다소 막연했던 창작의 윤곽이 잡히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너무 칭찬해서 민망한데;; 저자랑 아무 연관 없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다..)
이렇게 또 한 발, 게임 창작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과정은 항상 일 보 전진, 삼 보 후퇴인 것 같다. 가까워졌다 느끼면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도 어느 순간 가까워지고. 고민했던 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오면 좋겠다. 그때까지 지치지 않게 꾸준하게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