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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Oct 15. 2024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이 키건의 책들

맡겨진 소녀(2009년 출간, 다산북스, 2023년. 허진 역),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년 출간, 다산북스, 2023, 홍한별 역)     


‘뭣이, 중헌디? 뭣이, 그렇게 중허냐고!’ (영화 ‘곡성’ 중) 이 책들 읽는 내내,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책들은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긴 단편소설이다. 두 책의 출간 시기는 10년이란 틈이 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재차 존재의 의미를 뒤돌아보게 한다


「맡겨진 소녀」는 시골 농촌 마을의 한 가정에서 너무 많은 아이들 중 한 명인 소녀 코오트가 여름방학 동안 먼 친척에게 ‘맡겨진 소녀’가 되면서,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2022년 「말없는 소녀」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코오트의 아버지는 하루 중 대부분을 술과 도박(경마, 카드 게임)으로 보내며 중심을 잡아야 할 어른의 역할보다는 세상을 향한 불만으로 정작 실생활은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쇼트혼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하고 그걸 딴 사람이 곧장 소를 팔아 치웠던 카뉴 시장을 지난다.’(본문 p9)

킨셀라 부부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소녀는 킨셀라 아저씨와 바닷가 산책을 한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음을 깨닫는다.’(본문 p69-70) 그리고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본문 p75)

집에 도착한 날도 아빠는 집에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집이 축축하고 차갑다. 리놀륨 바닥은 더러운 발자국투성이다. 엄마는 남동생을 안고 서서 나를 바라본다.’ 우물에 빠졌던 소녀가 재채기하고 코를 풀어도, 얼마나 아프냐는 걱정보다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게 앞선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감기 안 걸렸다고요.’(본문 p93)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중략)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중략)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가오는 아빠를 보며,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그를 부른다. “아빠”’ (본문 p97-98)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나무가 누레진 10월부터 12월의 크리스마스 연휴에 이르기까지의 춥고 스산한 날의 이야기로, ‘나, 가족 등 개인’의 굴레에서 ‘우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임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화자인 펄롱은 1946년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윌슨 家에서 일하던 중 임신을 하게 된 펄롱의 엄마. 가족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미시즈 윌슨은 엄마에게 계속 일하도록 하며 펄롱을 돌봐주기도 했다.(본문 p15-16) 덕분에 펄롱은 건실하게 성장하여 아일린과 결혼하여 다섯 딸을 둔,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본문 p44)

강 건너 수녀원은 기초교육을 하는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를 겸업하고 있었고, 이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이곳이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보내지는 모자보호소라고 하기도 했다. 미혼모는 그곳 세탁소에서 일하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부유한 집안으로 입양시키며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도 했다.(본문 p49-50)

펄롱은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마룻바닥을 닦는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들 보게 된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하지만 펄롱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본문 p51)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아일린은 말했다. (본문 p57)     

펄롱이 다시 수녀원에 가서 석탄광 문을 열었을 때,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펄롱의 평범한 마음 한편에는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본문 p71)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본문 p99)

펄롱은 크리스마스 휴가 전 마지막 작업을 한 후, 수녀원을 향해 다리를 건넌다. 펄롱은 수녀원 석탄광 문을 열며, 다행히 여자아이(세라 레드먼드)가 없을 거라고 상상했지만, 여자아이는 석탄광 바닥에 있었고 펄롱은 아이를 부축해서 나오며 말한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본문 p116) 펄롱은 이렇게 속으로 되뇐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본문 p121)     


작가는 화자의 의식 흐름을 통해 잃어버린 빛(존재의 의미)을 찾는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두 책 모두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긴 여운을 남기는 책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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