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맥주와 88 스텔라 택시(3편 완)

by 그루터기


“오늘 일을 마치고 집으로 퇴근을 했어. 잠자리에 들었지. 그런데 나를 찾는 손님이 있다고 하니 무어 다시 행차를 할 수밖에...”

우리와 이제 구면이 된 드라이버의 너스레였다.

“형님, 그런데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내 나이 88세일세.”

순간 우리 일행은 벌린 입을 오랫동안 다물지 못했다. ‘이 많은 연세에 아직도 개인택시의 영업을 이어가다니...’

둘 중 하나가 그 이유라 짐작을 했다. 정말 생계가 어려워 이 쉽지 않은 생업에 아직도 몸을 담고 있거나, 아니면 경제적인 여유는 있으나 팔다리를 지속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여 건강을 유지하고자 쉬엄쉬엄 하는 소일거리일 것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주점으로 출발할 당시 ‘아저씨’란 호칭이 금세 자연스럽게 ‘형님’으로 돌변했다. 우리가 20대 초반에 이 드라이버를 처음 만났다면 당연히 아저씨로 불렀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제법 연식이 되었다. 게다가 생맥주를 들이켠 취기가 서로 상승 작용을 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 소나타 택시에 딱 맞는 새로운 별칭이 갑자기 떠올랐다. 내 나름 ‘88 스텔라’로 자신 있게 이미 작명을 마쳤다. 88세의 드라이버가 88년 서울 올림픽에 맞추어 새로이 세상 구경을 한 88 스텔라와 아주 아귀가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이 88 스텔라의 네모 반듯한 각진 차체의 형상은 오늘날 다른 차종과는 포스가 남 달랐다. 크롬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던 오토메틱 로고가 기억에 생생했다.

면 단위 경계를 이제 막 벗어난 ‘그럭고개’를 넘어설 즈음 우리는 주점을 향할 때 보다 훨씬 더 불안해졌다. 이 드라이버 형님의 연세가 무려 88세라는 사실도 이제 알게 된 데에 더하여 혹시 잠 기운이 아직 남아 있지는 않나 하는 우려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찾은 시절의 우리 백성들의 평균 수명은 45세 전후였다. 그런데 그 이후 경제적 번영과 비약적인 의료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지금은 평균 수명이 무려 80세를 넘어섰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와 평균 수명의 상승은 세계를 통틀어 최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인구 도시 집중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농촌이나 지방 중소형 행정구역의 소멸에 대한 우려도 높은 것이 현실이다. 우리 관내 인구도 최

고점 대비 무려 20%로 쪼그라들었다. 평균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다 보니 늦은 나이에도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88 스텔라 드라이버 형님의 모습이 결코 남의 일이나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이토록 높은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를 해야 하는 세상으로 어느덧 바뀌었다. 건강을 유지하지도 못한 데다 부를 축적하지 못한 채 장수를 한다는 것은 이미 축복이 될 수 없다. 이는 재앙일 뿐이라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우리는 출발지로 복귀했다. 민우는 택시요금으로 11,000원을 내밀었다. 이 드라이버 형님은 천 원권 지폐를 다른 권종으로 바꾸어 줄 것을 이번에는 당당히 요구했다. 친구 민우는 기꺼이 일천원권을 돌려받고 다시 일만 원권을 건넸다. 처음 6,100원 요금에 웃돈을 얹어 10,000원을 지불한 것은 분명 민우의 호의였다. 그런데 이번 20,000원의 택시요금 지불 건은 아주 경우가 달랐다. 민우의 첫 호의에 이어진 이번 건을 이 드라이버 형님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착각했던 것이었다. 민우의 두 번째 처신에는 찜찜함이 남았고 개운하지 못했다. 88 스텔라 드라이버 형님은 친구 민우를 혹시 ‘호구’로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오랜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88세 고령에 오토메틱이 아닌 수동 차량에다 그것도 88 스텔라를 방불케 하는 개인택시 핸들을 여전히 잡고 있는 드라이버 형님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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