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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Feb 06. 2024

'열린 음악회'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이 것이 어떻게 5억입니까. 50만원으로 적은 것 아닌가요?”

저희 이사장님이 확실한 것을 좋아하시니까, 이해 좀 바랍니다.”     

내가 @@투자신탁 강서지역 점포에 초임책임자인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대리로 승진한 이래 약 1년여간 영업점 내부에서 주로 개인 내점고객의 관리와 창구직원들을 통솔하는 영업총괄대리의 임무를 마쳤다. 최근 업무분장에서 발로 뛰는 외부 법인영업을 새로이 명받았다.   

  

당시 우리 회사 법인 주요거래처는 새마을금고 신협 등 영세금융기관이 대세였고 이에 지역 의료보험조합과 의보연합회가 결코 무시못할 '메가거래처'였다. @@지구 의보는 거래규모가 이 가운데 최상위그룹에 랭크되어 있었다. 다른 법인고객과 달리 이곳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신세를 지는 구조의 거래처는 아니었다. 우리 회사에선 모 증권회사의 점포장인 해당 의보 이사장의 특수관계인에게 응분의 우회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브로커리지 영업은 당시 모든 증권회사의 가장 큰 수익부문을 차지하고 있었다. 증권회사의 점포장은 물론 직원들은 속칭 주식 매매악정 실적에 시달리는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회사 생활의 생존을 좌우한다고 해도 절대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큰손이라 불리는 거액 개인자산가를 제외하면 모든 증권회사가 약정실적을 기댈 수  있는 곳은 3대 투신사였다. 이들에게 3대투신사는 가장 큰 법인 고객이었다. 신탁재산과 고유재산에서 창출되는 약정실적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 줄을 서는 것은 물론 목을 메기까지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주식의 '매매 오퍼'를 늘리기 위해 증권회사의 임원은 물론 CEO까지 투신사의 주식운용부서 임직원을 집중 공략하는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와 거래를 해주는 대가로 우리 회사는 이런 주식주문 오퍼를 이 의보 이사장의 특수관계인에게 우회하여 지원하고 있었다. 이런 보상관계로 얽히지 않은 거래처가 대세였다. 그럼에도 이 의보 이사장은 우리 법인팀에 뻣뻣한 태도를 고집했다. 최근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갑질의 주인공이었다.  

    

오늘 오전 이른 시각이었다. 1 년만기 공사채형 수익증권 신규 통장을 개설하여 자신들의 사무실을 방문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나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이어가며 머리를 조아리는 시늉까지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무려 5억을 추가로 입금해준다는 아주 반가운 소식에 나는 순식간에 거래처로 내달렸다.

     

그런데 오늘은 디테일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계좌개설신청서 입금액을 적는 란에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5억이란 금액을 아라비아숫자로 마음껏 흘려 적었다. 매번 이런식으로 적었음에도 거래처에서 이를 문제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을 꼬투리잡았. 통장과 계좌개설신청서 인감란, 출금전표 등에 거래 인감을 이사장이 날인해주는 것을 결재를 받느다고 불렀다. 그런데 금액 5억을 흘려 적었다는 이유로 오늘은 이사장이 결재를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통장 내지엔 보기좋은 글씨체로 정확히 5억으로 전산 인자가 되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우리 지점 법인 영업팀은 차장과 대리, 각각 1인씩 21조로 움직였다. 오늘은 내 직속상관 박차장은 지점 내부에 남아 개인 VVIP 고객 상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초임 책임자인 나 혼자 이곳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곁다리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사용인감 날인을 거절하는 이곳 의보 아사장의 행태에 담당 부장 과장도 내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통장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우리 지점, 법인팀 모두는 이 메가 거래처와 관계에서 절대로 갑의 지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비록 우리 주식운용부서에서 이사장의 특수관계인에게 주식 오퍼를 챙겨주는 일정한 보상을 주는 구도임에도 이는 전혀 달라질 수가 없었다.

     

차장님, 숫자를 이렇게 다시 적어 통장을 새로 만들었는데 한번 보아주세요?”

, 최대리 이번에 또박또박 제대로 잘 적었네. 어서 다녀오게.” 

나는 새로이 작성한 계좌개설신청서와 통장을 들고 눈썹을 휘날리며 이 거래처로 들어섰다. 이래서 오늘 헤프닝은 가까스로 수습이 되었다.

      

조대리, @@의보가 우리 지점하고 거래하고 있는 것, 알고 있지?”

그래 그곳 이사장 특수관계인에게 주식매매 오퍼를 제법 밀어주고 있는데 별로 원만한 관계는 아니야. 좀 머리도 아프고...”     

주식운용부에 근무중인 입사동기와 오늘 서로 고충을 털어놓았다. 다른 모든 증권회사 임직원으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고 있는 운용관련부서 직원으로선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 일이 있은지 약 1개월 후였다. 의보 한대리는 내게 당시 그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성악을 전공하고자 하는 이사장의 장남이 이번 대학입시에서 국립 S대에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셨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사장의 심기가 편치않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사장 아들이 대학입시의 문턱을 가뿐히 넘어섰더라면 내가 그 거래처와 지점을 두 번이나 오가는 수고를 하지않아도 될 것이었다.


당시 우리회사는 영업점 직원들의 개인별 실적을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하기 훨씬 전이었다. 또한 근무평정에 따라 개인별 급여수준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건으로 이 메가거래처의 이사장 이하 부장 과장 등 책임자의 심기를 건드려서 내가 이득을 볼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우리 법인팀장, 점포장에게 낙인 찍힐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 사건이 터진 후 벌써 만 1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법인영업팀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팀장은 박차장에서 심차장으로 바뀌었다. 흘려적은 금액건의 전모를 내가 심차장에게 전한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 이번엔 뜻밖의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의보 이사장 장남은 재수생활 내내 절치부심한 끝에 지난 해에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런 이사장에게 축하의 뜻을 전함은 물론 덕담을 하나 더 건네라고 심차장에게 외람되지만 코치까지 했다. ‘이제 조만간 열린 음악회 무대에서 아드님을 볼 기회가 올것이라고...’ 덕담의 구체적인 방향도 잡아주었다.   

   

최대리 조금 전에 만난 이사장에게 아들 열린음악회 출연 운운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심차장과 나는 지점으로 돌아오는 업무용 차량에 몸을 실으며 멋쩍게 웃고 말았다. 이사장 장남이 국립 S대 음대에 합격 소식을 들은 것을 기화로 내가 계좌개설산청서 금액란에 아라비아 숫자를 종전처럼 흘려 쓸 자신은 여전히 없었다. 초등생 글씨처럼 그저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심차장님,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챙겨 주셨어야지요? 너무 서운합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투자신탁 책자형 다이어리 30권만 보내주세요.”

이 의보 경리팀 한대리는 그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당돌한 요구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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