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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Mar 01. 2024

‘소장기예(少壯氣銳)’의 유효기간(1편)

                     

오전 시간 답안지에 이름을 빠뜨렸는데요?
 그럼 영점이 당연하지요.”
 공인중개사시험이 도입된 후 처음 치러진 시험장에서의 일이었다.    

 

어차피 1차2차 시험 통틀어 40점 과락 없이 전 과목 평균 60점 이상을 얻으면 합격 문턱을 넘어서는 절대평가 시험었다. 그래서 다른 수험생이 고득점을 하거나 자신보다 높거나 낮은 점수를 얻는가는 자신의 합격 여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같은 교실의 수험생이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 누락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감독자에게 묻는 질문에 건너편의 다른 수험생은 마치 자신이 시험 총괄책임자라도 되는 양 이를 영점처리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래서 우리 수험생 모두는 포복절도했다. 

우리처럼 20대 초중반의 수험생 비중도 적지 않았지만 어르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내가 사법시험 수험생활을 학부 졸업 후 대학원 시절까지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부동산 중개시장에서 오랜 기간 잔뼈가 굵어진 어르신들도 대거 이번 시험에 출사표를 던졌다. ‘부동산 중개사는 예전의 한지 한의원’ 자격 제도에 유사했다. 기존 영업권역 내에서 종래처럼 영업활동을 이어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영업장을 옮겨가려면 이 부동산 ‘공인’ 중개사 자격 취득이 꼭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험 일정은 사법시험이 마무리된 이후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이번 시험엔 사법시험 준비생들도 틈을 내 이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대세였다. 자신의 수험생활이 길어지면 이 자격증을 대여하여 책값이라도 벌어보려는 작정에서 비롯됐다. 이 공인중개사 시험과목은 민법, 부동산 공법, 국민윤리 등이 사법시험 과목과 겹쳤기 때문에 수험생들에겐 좀 수월할 듯했다. 고시촌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겐 어쩌면 좋은 기회였다.   


어이, 학생 이 사과 한쪽 들어요. 혹시 2차 시험 문제집 여유가 있으면 빌려볼 수 있을까요?”

이 시험은 1차는 4지선다형, 2차는 단답형과 약술형등으로 출제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험 초기라서 이번엔 12차 모두 4지선다형으로 같은 날 동시에 치르기로 한 바 있었다. 오전 1차 시험을 치른 나는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해결한 후 학교 운동장 둘레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나무벤치에 앉아 2차 수험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던 내게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어르신 수험생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오늘 그저 1차 시험만을 치를 생각으로 이곳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생각보다 오전 1차 시험의 난이도가 낮아서 2차 시험도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 분명했다.

     

이 어르신들은 우리 세대에 비해 각종 시험을 치른 경력이 적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시간 배분과 답안지 작성 요령 등에서 매우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젊은 수험생에 비해 이해력, 암기력, 응용력, 추리력 등 든 부문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우리가 보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용어는 물론 이론이나 계산문제 등을 해결하기가 버거운 것이었다.

     

아무리 부동산 중개업 분야에서 오랜 기간 잔뼈가 굵은 관록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시험 문제의 지문을 신속히 읽고 정답을 골라내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었다. 실무경력과 이론과는 많은 간극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준수야 오늘 시험은 잘 보았지? 시험 문제는 어땠어?”

운주야, 난 이번 시험을 치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소장기예(少壯氣銳)’였어.

젊다는 것이 이리 좋은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지.” 

    

어느 시험이나 시행초기, 특히 제1회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 당시나 지금 모두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번 시험은 출판사와 학원에만 좋은 일을 시켜 준 것 같아...”

 문제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많은 합격자를 배출한 것에 관해 상준이 형의 일갈이 있었다. 상준이 형은 직접 출판사를 찾아 수험교재를 무료로 얻어내는 수완을 뽐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네...

내가 이번에 준비 중인 @@자격시험 민법 모의고사에서 겨우 52.5밖에 못 받았어. 아이, 이런 개망신이 있나. 창피해서 누구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렵네.”

그 정도면 접싯물에 코라도 박아야 하는 것 아니야?”

아주  정확한 진단이군.”

대학 동기 절친 학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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