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치료를 받아야 되나요? 제 주위에도 친구 학교 선후배 등 의사들이 제법 있거든요. 제가 조만간 상경을 해야 되는데 이 것 때문에 미루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정형외과를 찾아도 되는 것이지요?”
‘별 것 아닌 것 같은 증상에 과잉대처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미로 나는 끝내 불만의 핵심을 넌지시 내비쳤다. 이러자 순간 원장이 약간 움찔하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이곳에 무려 여섯 번째 방문하는 날이었다. 원장은 내가 자신에게 어필하는 정확한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린 듯했다.
“예, 이제 다 나으셨습니다. 처방해 드리는 약은 드셔야 합니다.”
이제야 원장은 치료의 종료를 알렸다.
나는 이곳을 세 번째 방문한 날부터 약국에서 받아 든 내복약을 한쪽으로 밀쳐 두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몸통종기란 증세에 계속 약을 복용한다는 것은 내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웬만한 치료약은 위장은 물론 간장, 신장에 모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고교동기 절친 약사의 귀띔이 떠올랐다.
“환자분이 원장님께 직접 말씀하셔야 합니다.”
간호사가 내게 사무적으로 안내를 했다. 나는 실손보험금 수령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소견서’와 ‘의료비 세부내역 명세서’를 요구했다. 여차하면 관계 당국에 ‘과잉진료행위’로 고발하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의료비 총액이 나 혼자만을 따지면 미미했지만 다른 환자 모두를 감안하다면 그 규모는 결코 적지 않을 듯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몸통종기 치료를 위해 이곳을 무려 6번이나 찾았으나 건당 의료비가 보험약관에 정한 보상 기준금액에 모자랐다. 그래서 사실은 실손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혹시 나중이라도 과잉진료의 행태를 따져 묻고자 하는데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차원이었다.
내 물음에 이렇게 대꾸를 하는 약사의 태도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이 @@외과의원 처방전을 거의 독식하는 해당 약국의 약사로선 원장에게 우호적인 답변 말고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이번 뾰루지건으로 이 의원을 찾은 나는 어쩌면 원장 입장에서 보면 ‘까칠한 환자’내지 블랙컨슈머로 분류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순박한 시골 독거노인 환자들에게 전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이 은밀한 과잉진료 행위를 문제 삼고 개선할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곳 원장의 은밀한 과잉진료행위를 무조건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골 독거노인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이들은 ‘충성 우량환자’가 아니라 ‘만만한 봉’으로 보인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만약 내가 늦게나마 넌지시 이 원장의 진료 행태를 나무라는 시그널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의 이곳 방문 횟수는 이미 두 자릿수를 넘어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증상이 심합니다. 오늘은 항생제를 쓰겠습니다. ‘
내가 사십 초반 시절이었다. 비교적 양심적인 내과 의사 대처가 이곳 원장의 그것과 대비되었다. 당시 두드러기를 동반한 심한 식중독으로 병원을 찾은 내게 항생제를 처방해야 하는 이유를 친절하게 사전 설명에 나선 것이었다.
나도 어느덧 이미 의료 관련 여러 가지 부문에서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고혈압 고질혈증 당뇨병이 하나의 세트로 동행한다는 고위험군 노출에 근접해 있다. 아울러 이에 더하여 ‘과잉진료’의 타깃에 노출될 또 하나의 고위험군 한가운데 들어온 것도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