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터기 Sep 03. 2024

미술전시회 팸플릿 모아 오기

                        

그림이 아닌 꽃 전시회인데, 이 팸플릿을 모아도 가점을 받을 수 있을까?”

에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전시회에 가보자고, 아니면 국화를 본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가 아니겠어? “

이번엔 서양화나 동양화 등 그림이 아니라 ’ 국화전시회‘였다.  

    

고교 1학년 1학기 첫 미술 수업 시간이었다. 같은 세대 대비 신장이 월등하게 크고 후리후리하며 구레나룻이 일품인 미술 선생님이 등장했다. 외모만 보아도 예술가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1학년 내내 학교 밖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회에 들러 종이책자로 묶어낸 전시회 팸플릿을 모아라. 그러면 학기말마다 평가하여 미술 성적에 가점을 주겠노라고 공언을 했다.  이래서 우리 친구들 대여섯 명은 시내에서 열리는 전시회 일정에 관한 정보를 공유했고 방과 후 떼로 몰려 미술전시회장을 찾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림 그리는 분야에선 조그만 기본적인 재능도 없는 나였다. 두 번의 학기말 평가에서 내 모자란 재능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성적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다니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주위 친구들과 어울려 미술관 전시회 관람 행차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고교 1학년 생인 우리들은 특기생으로 학교문을 들어선 친구들과 달리 그림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전시된 그림 등 미술품을 감상하기보단 오직 가점을 받기 위해서 팸플릿을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음은 같았다.  

   

종이책이나 종이 문서가 보기 드문 모바일시대인 지금과는 달랐다. 당시엔 상당한 수량의 종이 팸플릿을 미술관 전시회마다 제작, 준비하여 관람객에게 배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5 내지 10명이나 되는 고교생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팸플릿부터 손에 넣는 일이 흔치 않았다. 이런 사재기가 일어나다 보니 이 팸플릿이 일찍이 동이 나기도 했다. 미술품을 감상하러 이곳을 방문하는 실수요자의 몫이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지금이야 미술 전시회는 물론 음악회에서도 실비보상 차원에서 유료로 배포하기도 하지만 당시엔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대세였다. 작품 감상은 뒷전이고 전시회 안내팸플릿만을 먼저 챙기려는 남자 고교 1학년 생 무리가 무더기로 전시회장을 들어서는 것을 주최 측이 반길리는 없었다.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기대어 전시된 작품 감상은 뒷전이었고 오직 팸플릿 한 부씩을 확보하면 우리의 당일 임무는 종료되는 것이었다. 전시된 작품을 고가에 구입해 주거나 작가를 후원해 줄 리가 만무한 학생들이 오직 종이책자 팸플릿을 축내는 것은 결코 반길 일이 아니었다.      


우리 미술 선생님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좋은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점점 작품을 보는 안목이 늘어나는 것을 기대했음은 물론이었다. 우리가 이 전시회를 방문하는 횟수가 드디어 두 자릿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도 모르게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팸플릿을 챙겨 가방 깊숙이 챙겨 넣은 다음 전시작품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돌아서서 출구를 향하던 종래의 패턴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어차피 미술 전시장에 들른 김에 건성이지만 작품을 한 바퀴 정도 휘이익 둘러보기 시작했다.

     

팸플릿을 챙긴 후 전시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팸플릿을 챙기는 것이 유일한 최종 목표였지만 전시장에 들른 김에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고자 하는 뜻있는 작은 습관이 어느새 생겨났다. 미술 선생님의 본래의 의도가 우리에게 먹혀들기 시작했다. 팸플릿 수집에 따른 가점 혜택이란 당근책이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 느리고 작은 보폭이었지만 바람직하고 담대한 변화의 초입에 서게 되었다.  

    

가끔은 전시장에 상주하던 해설자의 친절한 설명을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작품을 낸 화가의 생애가 어떻고 세상을 보는 눈은 이랬고 구도, 원근법, 명암, 농담 등 제법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화가가 세상에 던지는 최종메시지까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장족의 발전을 한 자신들을 볼 수가 있었다.   

   

이렇게 수채화 한편을 학생 시절에 그려보고 그러면 최소한 ’ 작은집‘을 들락거릴 일은 없을 거야. 좋은 정서의 함양에 아주 큰 보탬이 된다니까.”     


선생님은 늘 이런 가르침을 이어갔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를 뒤돌아 보았다. 1주일에 겨우 2시간 배정된 미술시간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정서를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오늘은 그림이 아닌 국화꽃 전시회에 다녀왔다. 수많은 품종의 국화를 다양한 모습으로 꾸민 국화의 바다에 푹 빠져보았다. 은은한 향기를 맘껏 뽐내는 국화꽃 감상에 올인했던 오후 시간이었다.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길고 긴 사회생활 기간 전시회를 방문한 걸 모두 모아보았자  고교시절 전시회 방문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 아날 수 없다. 다가오는 가을엔 당시 우리 미술 선생님 혼자만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방문을 고교동기들과 추진해 보고자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