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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Sep 21. 2024

금융인은 영원한 '을'신세인가

"아니 금융기관 직원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고객의 신분증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정말이지
어떻게 된 것인지 말씀 좀 해보세요."

나는 오늘 고객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내 절친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주요 고객이었다. 약 3년 이상 꾸준한 거래를 이어오던 중이었다. 이 팽여사는 서울 소재 @@종합시장 한 곳에서 의류도매상을 꾸려가고 있었다. 주로 일본인 관광객이 이곳의 단골 고객이었다. 이곳에서 오랜기간 영업기반을 다진 결과 꾸준한 매출 성장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소속된 영업점은 수도권 외곽의 신도시 상가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장을 일과 중 오가기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팽사장이 우리 점포로 직접 찾아 업무처리를 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그래서 우선 유선으로 상품을 선택하여 단말기 조작을 마무리한 후 고객의 기명날인을 받는 일은 추후 보완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나는 약 열흘 전 이 @@시장 팽사장 점포를 직접 찾아 나섰다. 이번에 새로이 재투자하기로 결정한 해당서류에 기명날인을 받고 본인확인의 증빙으로 신분증 사본을 징구하고자 했다. 팽사장의 주민증을 넘겨받은 나는 이곳 근처의 문구점 등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이라도 수소문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았다. 이런 사정을 내게 전해 들은 팽사장은 자신의 주민증을 나중에  사무실로 복귀하여 복사본을 챙긴 다음 자신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어도 된다며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튿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주민증  복사를 마쳤다. 그런 다음 이 주민증 실물을 '특별배달증명'으로 발송하고자 직접 우체국에 들러 이 임무를 빈틈없이 처리하고 확인증까지 챙겼다. 다른 서류를 일반등기 우편으로 처리하는 것과 달리 고객의 통장, 신분증, 카드, 인감등은 한층 더 분실이나 사고가능성을 줄이고자 이 제도를 나는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팽사장은 아직까지 자신의 주민증 실물이 도착하지 않았다며 내게 제대로 된 항의를 하고나선 것이었다. 다른 고객이 단골로 내세우는 금융기관 직원의 기본자세를 들먹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즉각 확인 모드에 돌입했다. 내가 고이 보관 중이던 접수증에 적힌 날짜와 우편물번호는 물론 나중에 내게 다시 회신된 증빙자료도 찾아냈다. 이 특별배달증명 우편이란 일반등기 보다 한층 더 안전장치가 추가된 것이었다. 배달일자와 시각, 배달우체부 성명, 수령인 성명과 사인까지 적힌 엽서를 발송의뢰인에게 회신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역추적에 나선 결과 팽사장의  주민증 실물을 직접 수령한 자는 팽사장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내막을 즉시 팽사장에게 알렸음은 물론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나는 팽사장으로부터 그저 지나가는 형식적인 사과 멘트라도 듣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 혼자만의 욕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금새 드러났다. 자신의 아들이 주민증 실물을 대신 수령했음에도 이를 자신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금융기관 직원의 기본자세 운운한 건에 관해서는 진솔한 사과는 커녕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 또한 금융기관 직원의 숙명이나 팔자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의 수와 자산규모를 키워 수익을  늘리는 것이 절체절명의 소명이니 이 팽사장의 과실을 따져 묻는 것도 '금융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에 당연히 어긋나는 것으로 볼 일이었다.


금융기관 직원의 과실이 아닌 고객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에도 한마디 항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영원한 '을'의 지위에 머물러야하는 것이 금융인의 숙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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