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3개월간의 극한직업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런 뒤 약 6개월간의 꿈같은 휴가를 알뜰하게 보냈다. 퇴직금, 연차, 실업급여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믿고선 자격시험 준비, 글쓰기, 둘레길 걷기, 책 읽기 등을 황금비율로 나누어 알뜰하게 사용했다.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휴가를 고향으로 귀촌하여 최근 마무리했다.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시 밥벌이를 위한 일자리 찾기에 나섰다. 과거의 경력이나 스펙은 내가 일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장애사유로 작용했다. 이력서의 최종학력은 반드시 ‘고졸이하’로 채워야 했고 현직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각종 금융기관직원에게 필요했던 다양한 자격증은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이미 이 극한 직업의 업계에선 일종의 ‘위장취업’이란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었다. 구직자나 사람을 쓰고자 하는 사람 양쪽 모두는 이에 관해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서로 잘 알면서도 문제를 삼지 않기로 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이 극한직업이란 일자리를 구하기도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최소 1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했고 급여 수준에 따른 엄격한 기준의 연령제한을 받았다. 강남지역 300만 원 수준의 급여를 제시하는 곳은 40세 이하를 요구했다. 취업정보를 제공하는 곳은 널려 있었다. 단순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곳과 달리 채용 단계에 까지 조력을 해주는 곳은 일정한 대가를 요구했다. 면접시험을 통과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면 즉시 월급여의 10%를 컨설팅비용으로 선지급해야 했다. 종래엔 1개월분 최초 급여수령 시에 지급했으나 이젠 선급으로 바뀌었다.
내가 인생 이모작에 나선 후 갖은 풍상을 겪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첫 번째 면접에서 그것도 귀가 도중 합격의 기별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를 즐거워야 할 일로 보아야 할지 약간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취업컨설팅의 소개로 이곳에 왔노라는 내 마지막 언급이 면접시험에서 합격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실업급여가 모두 바닥나기 전에 나는 이미 일자리 구하기에 나섰으나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지인이 내게 일자리 알선 약속을 한 기한까지 약 1개월 여가 남아 있었다. 이 공백도 그저 무위도식으로 버틸 수 있는 여유가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이미 예정된 채용계획이 늦어지거나 최종 무산될 가능성도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13개월이란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몸을 담았던 일자리와 이곳의 시스템은 너무나 달랐다. 우선 전자가 1인 1초소 형태인 반면 이곳은 2인 1초소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급여는 이곳이 약 30-40여만 원 정도 높았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이 이 일자리가 내게 만족을 가져다주는가의 여부는 금전적 보상의 다과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첫 출근일부터 깨달았다.
첫 번째 가장 도드라진 차이점은 총 휴게시간과 점심, 저녁, 야간의 휴게시간 배치간격 등이 문제였다. 전 근무지에선 2.5, 1.0, 6.0(9.5H)이었던 반면에 이곳은 2.0, 1.5, 4.0(7.5H)이었다. 이곳은 근로계약서상 총 휴게시간이 9시간으로 엄연히 적혀있었으나 실제론 7.5시간에 불과했다. 참으로 이런 경우도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근무는 2인 1조로 굴러가다 보니 매일 잠자리에 드는 시각은 오후 9시 ~ 새벽 1시 또는 새벽 1시 ~ 5시로 교차되었다. 초소가 24시간 풀 가동되어야 했으며 잠시라도 공백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점심과 저녁시간의 배치엔 그리 큰 부담이 없었다. 밤 수면시각이 매일 달라지다 보니 정해진 시각에 도저히 깊은 잠에 들 수 없는 구조였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고통스러울 따름이었다.
24시간 맞교대 시스템만으로도 사람의 바이로리듬을 깨뜨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곳의 2인조 시스템은 바이오리듬을 통째로 망가뜨린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그다음은 자질구레한 부수적인 업무가 넘쳐 났다. 우선 평일 오전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아파트 단지 내 교통정리 업무가 추가되었다. 기록적인 더위에도 불구하고 교통경찰이 착용하는 것과 유사한 복장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제대로 통풍이 되지 않는 비닐이나 부드러운 플라스틱 재질 때문에 한여름에 찜질방을 체험하는 코스에 다름이 아니었다. 출근길에 오르는 승용차나 취학 전 아동의 각종 학원차량이 수시로 뒤엉켰다.
하지만 이때가 오기를 아주 간절하게 기다리는 이는 따로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똠방 반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젊은 시절 논산 훈련소인 연무대에서 신병교육에 몰입했던 그였다. 신교대에서 조교로 근무했던 이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내세우며 나대는 ‘똠방’이었다. 당시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내외에 널리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신호봉은 기본이고 하얀색 면장갑에 호각까지 동원하니 이른바 ‘자세’가 제대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근무 중인 2초소 앞에서 정위치한 똠방은 다른 대원들이 교통정리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여부를 감시하는 희열까지 느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