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수 씨 머리가 단정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근무일이지만 내일은 쉬는 날이니 이발을 하고 출근하세요.”
고등학생이나 더구나 군 복무 중인 사병 신분이 아님에도 두발이 불량하다고 지적당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똠방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훈련병에 지시하듯 했다. 향후 이곳에서 내 생활이 만만치 않을 것을 내게 일러주는 첫 신호탄이었다.
이 똠방은 휴대폰을 통한 호출에 더하여 내 근무지인 1단지 초소에 수시로 직접 오갔다. 하루에도 10회 이상이나 내 근태를 체킹 하거나 업무지시를 내렸다. 때론 반장인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업무도 절대군주가 백성에게 시혜를 베풀 듯이 생색을 내며 수행했다. 근무자의 일손이 부족하거나 식사 시간, 휴게 시간 동안 단지를 출입하는 차량 차단바를 자동으로 전환했노라며 매번 자신이 휘하의 직원들에게 엄청난 배려를 했노라며 자랑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때론 오늘은 혼자이니까 약 1시간 전에 출입문을 잠가버리고 잠을 자라는 선심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권한을 한참 벗어나는 결정이어서 그저 ‘립서비스‘에 불과함을 모든 근무자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릇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것은 도통 그 앞날을 예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일을 하고자 지원한 후 면접시험을 치르기 위해 1단지 초소에 도착하던 순간이었다. 초면이 아닌 낯이 제법 익은 사람과 맞닥뜨렸다. 지난번 같은 근무지 같은 초소에서 내 교대 근무자로 일한 적이 있었던 지원자였다. 이 지원자는 먼저 악수를 청하며 아는 척을 했다. 지난번 근무지에서 근태불량자로 지적을 당하여 쫓겨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은 이곳에서도 면점 시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 언제 어느 곳에서 또 무슨 인연으로 다시 보게 될지는 신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선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어쩌면 조그마한 척을 지고 살길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누구와도 이른바 ‘원한관계’를 맺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제초작업을 할 텐데,최대원 관리구역을 알려드릴 테니 같이 가봅시다.”
본디 제초작업이란 특히 화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경비대원의 몫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를 따져보았자 내게 불이익만 돌아올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규정과 현실의 갭이었다. 이 제초작업을 거부하려면 먼저 이곳을 떠날 각오가 먼저 필요했다. 나는 군소리 없이 해당 구역의 제초작업을 깔끔히 마무리했다.
그런데 여가까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예초작업을 해야 한다며 1시간 정도 고생해 달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똠방과 내가 2인 1조로 작업을 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즘 해서 내가 동료대원이 공석 중인 자리를 메꾸고 있는 2 초소로 팀장이 불쑥 나타났다.
“팀장님, 우리 최대원이 자진해서 예초작업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요? 이런 일을 해보셨나요?”
“예 저도 시골에서 많이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쪽으로 가서 장화, 낫 등 장비를 챙깁시다.”
똠방과 팀장 나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참으로 ‘아닌 밤에 홍두깨’였다.순간 나는 똠방에게 뒤통수를 아주 힘차게 한 대 얻어맞은 것이었다. 애초 팀장과 똠방의 공동 작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똠방 자신은 빠져버리고 나를 슬그머니 끼워 넣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예초 작업을 자원한 적이 없다는 말을 팀장에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쯤 되면 정치인들이 자주 거론하는 ‘음모’에 충분히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디서 이제껏 ‘못된 짓거리’만 배우고 몸에 익혀온 똠방이었다.
애초에 똠방과 팀장 공동작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내가 자신 대신 그 일을 하겠다고 자진해서 나선 것으로 일을 꾸몄고 이는 사전에 팀장도 용인한 것으로 보였다. 미리 두 중생이 짜놓은 각본으로 보였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제껏 똠방이란 작자는 세상을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는지 그 정체가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모사꾼’에 다름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자진해서 예초작업에 나서겠다는 말 한마디도 입밖에 낸 적이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렇다고 이 마당에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노라고 반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참으로 치졸한 공작놀음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 똠방을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디서 분명 한 번은 마주친 기시감이 들었는데 이제야 그 정체가 드러났다. 내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초임 점포장으로 부임하여 나를 정년 이전에 자리에서 밀어내려던 까마득한 입사 후배 사이코점장과 싱크로율이 만점에 가까웠다. 결국 이 사이코점장은 부임한 지 6 개월 만에 지점장이라는 지배인 자격을 반납해야 했다. 나 이외의 제2, 3의 다른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을 막고자 서너 군데 손을 써서 이 사이코 점장을 지배인 자리에서 끌어내는 데 성공한 자랑스러운 이력을 나는 얻게 되었다.
당시 이 사이코점장을 이후 쭈욱 머리에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와 아주 똑같은 캐릭터의 중생을 만났다. 내가 전생에 커다란 죄를 지은데 대한 업보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어쩌면 이리 똑같은 인간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바야흐로 세상은 요지경이었고 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